‘서울 공화국.’ 국내 인구의 절반과 기업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된 현상을 빗댄 말이다. 중앙집권 체제를 지방분권으로 전환하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은 소멸을 우려할 만큼 ‘생존 위기’에 놓여 있다. 지역은 저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더는 수도권에 집중된 산업에 매달리지 않고 독립된 산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메가시티 조성과 첨단산업, 규제 특혜를 통한 혁신 산업 선점 등이 대표적이다. 지방이 활력을 잃고 결국 소멸한다면 국가도 지속가능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통합적 균형 발전은 갈수록 심화하는 수도권 집중 현상과 지방 소멸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열쇠다.
◆탈산업화로 지역 발전 꾀해
지역이 발굴한 신산업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탈산업화다. 기존의 제조업에서 벗어나 인공지능(AI)과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등 각종 첨단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27일 각 지방자치단체에 따르면 광주시는 AI산업에 적극적이다. 연관기업 유치와 데이터센터 건립 등 인프라를 구축해 AI산업을 선도한다. 광주첨단3지구에는 2025년까지 1조217억원을 들여 AI산업융합 집적단지를 만든다.
인천시는 ‘바이오 클러스터’에 집중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 기술 혁신에 필요한 모든 구성원과 네트워크를 갖춘 곳은 인천이 유일하다는 판단에서다. 송도 바이오클러스터는 2000년대 초부터 공항과 국제도시 입지 강점을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생고뱅코리아, 머크 등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특히 청라는 수소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SK가 액화수소플랜트 구축에 5000억원을 투자하고, 현대모비스는 청라에 1조원 규모의 수소연료전지 연구·생산시설을 구축한다.
신재생 에너지 산업에 뛰어든 지자체도 있다. 울산시는 ‘부유식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조성한다. 이 사업은 해안에서 50여㎞ 떨어진 해상에 부유 물체를 띄우고, 그 위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해 에너지를 얻는 식이다. 원자력발전소 6기와 맞먹는 규모로 576만가구가 쓸 수 있는 전력을 생산한다.
경북도는 메타버스 산업에 주목하고 있다. 1000조원 규모의 성장이 예상되는 메타버스 시장을 선점해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의도에서다. 도는 지난해 싸이월드와 메타버스 플랫폼 활용을 위한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지자체 최초로 메타경북기획팀을 꾸린다. 메타버스 한류타운 조성과 가상경제융합 플랫폼 구축 등의 사업을 추진해 경북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서다.
◆반도체·이차전지 등에 대규모 투자
경기도는 미래형 반도체 산업에 사활을 건다. 특히 평택·화성·용인 등을 중심으로 세계 최대의 최첨단 ‘K-반도체 벨트’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관련 기업들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향후 10년간 삼성전자 평택·화성캠퍼스와 SK하이닉스의 이천 M16 팹,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등 국내외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예정돼 있다.
부산시는 세계 일류의 ‘파워 반도체산업 허브’를 조성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파워반도체는 가정 및 산업용 전자기기에 필요한 전력을 변환하고 제어하는 핵심 부품이다. 컴퓨터 통신 가전 등에 주로 쓰인다. 부산시 관계자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파워 반도체산업 연구기반 확충과 파워 반도체 상용화 기반 조성 및 기업 육성, 네트워킹을 통한 클러스터 조성 등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포항시는 이차전지로 지역 발전을 견인한다는 전략이다. 이차전지 업계의 ‘빅3’로 불리는 대기업이 모두 포항에 공장을 짓는다. 포스코케미칼은 양극재와 음극재 공장을 가동하고, 삼성SDI는 연간 3만1000t 규모의 차세대 이차전지 양극재 생산 공장을 건립한다. GS건설은 내년까지 1000억원 규모의 이차전지 배터리 리사이클링 공장을 짓는다.
경북 구미시도 이차전지의 핵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이차전지 앵커기업인 LG BCM이 5000억원을 투자해 구미 5국가산업단지 내에 연간 6만t의 양극재를 생산하는 공장을 짓는다. 단일 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대구시는 꾸준히 집중해 온 ‘5+1 신산업’(물·미래 차·에너지·의료·로봇+스마트시티)의 몸집을 키운다. 실제로 대구시는 전국 1위의 의료산업 수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물 관련 148개 기업이 지역에 둥지를 틀면서 수출 1조원대의 국내 최대 물산업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오는 5월에는 에너지 산업계의 올림픽이라고 불리는 세계가스총회 개최를 앞두고 있다.
국내 무역수지 흑자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충남도는 기존 주력 산업을 고도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와 친환경 모빌리티, 스마트 휴먼바이오 등의 기술 경쟁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제주도는 탄소중립 선도지역의 위상을 다진다. 특히 올해 전기·수소차 분야에 1205억원을 투자해 전기차 전후방 산업 육성과 수소 인프라를 구축하고 전기차 3만대 시대를 연다.
◆지역 인재 채용 위한 지역형 일자리 늘려
전국 지자체는 청년은 물론 신중년, 노인 등이 만족할 수 있는 일자리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 대전시는 지역 내 대학 재학생의 조기취업을 지원한다. 또 연구소기업과 벤처기업 등에서 직무체험 기회를 제공해 실무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경기 용인시는 오는 2028년까지 21개 일반산업단지와 8개 도시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해 7만7000개의 일자리를 만든다.
부산시는 지난해 23개의 국내외 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쿠팡과 BGF리테일, LX인터내셔널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2조1685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액을 유치하고, 8362개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인천시는 ‘통 큰’ 청년 지원책을 내놨다. 인천 소재 중소·제조기업에 재직 중인 만 18∼39세 근로자에게 1인당 최대 120만원의 복지포인트를 지급한다. 업체가 신규 채용을 하면 2년간 월 최대 200만원의 인건비를 주고, 청년에게는 2년 이상 근속 시 3년차 인센티브 1000만원을 제공한다. 노인일자리 4만6051개를 만들어 저소득 노인에게 안정적 소득을 보장한다.
충북도는 올해 11만1400명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뒀다. 충북도 관계자는 “좋은 일자리는 좋은 인력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바이오산업 전문인력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면서 “오송재단(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과 충북대병원, 카이스트, 한국바이오마이스터고 등에서 실무 중심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울산시는 일자리 만들기 협력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을 통해 신규 일자리 4000개를 창출한다. 급변하는 일자리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자 중장년층 지원책도 내놨다. 중장년 활력업(up) 일자리와 은퇴예정자 교육지원, 퇴직자 전직 훈련 등을 통해 고용정책 사각지대를 해소한다.
전문가들은 지역이 자생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 지원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민 숙명여대 교수(행정학과)는 “지역소멸 위기는 현재 농어촌에 국한된 문제이지만 점차 중소도시 등으로 번져 나갈 것”이라며 “지역의 장점을 살린 특화 신산업을 육성해 미래형 산업구조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뭉쳐야 산다”… 지자체 ‘메가시티’ 구축 합종연횡
초광역 메가시티를 향한 지방자치단체들 움직임이 활발하다. 메가시티는 중소도시와 인근 농·산·어촌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해 발전을 꾀하는 거대도시(특별지자체·지방연합)를 이른다. 민간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할 만한 거대 시장이 만들어지고, 중앙·지방정부는 불필요한 경쟁이나 중복 사업을 벌이지 않아 비용 낭비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 전국 4개 권역(부산·울산·경남권, 충청권, 대구·경북권, 광주·전남권)을 중심으로 메가시티 논의가 활발하다. 정부가 발전계획이 수립되는 초광역권부터 특별협약 체결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통합을 선택한 지자체들이 메가시티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메가시티 선봉에는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이 있다. 3개 시·도는 올해 상반기 ‘부산울산경남특별연합’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국 최초 특별지자체인 부·울·경 메가시티가 출범하고, 광역 대중교통망 구축으로 1시간 생활권이 갖춰지면 인구 1000만명에 지역내총생산(GRDP) 491조원의 동북아 8대 메가시티가 형성된다.
부울경은 초광역 철도·도로·대중교통망과 탄소중립 산업기반 구축, 디지털 신산업, 문화·관광 등 16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3개 시·도의회 의원 수 배분 문제도 결정을 앞두고 있다. 단체장은 부산시장과 울산시장, 경남지사가 순번제로 돌아가며 맡는 방안이 유력하다.
대구·경북 역시 메가시티 조성에 적극적이다. 대구시는 올해 경북 군위군을 품는다.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군위·의성군에 짓는 조건으로 군위군을 대구시로 편입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대구·경북은 올해 초 ‘대구경북광역행정기획단’을 설치해 연말쯤 ‘대구·경북 특별지자체’를 공식 출범한다는 계획이다.
충청권도 메가시티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2024년까지 대전·세종·충북·충남의 행정통합을 추진한다. 이들 시·도는 ‘4차 산업혁명의 중심지, 미래산업의 메카’로 성장한다는 비전을 갖고 특별지자체를 설치한다. 2040년 인구 600만명, 2000개 국내 기업 유치, 24만개의 신규 일자리 창출 등을 기대하고 있다.
광주시는 전남 5개 시·군(나주·화순·담양·함평·장성)을 단일경제권으로 묶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빛고을 스마트 메가시티’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메가시티와 특별지자체는 인재와 자원을 수도권에 빼앗긴 비수도권의 불가피한 생존전략이라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는 “영국의 맨체스터지방연합과 일본의 간사이광역연합 등은 초광역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메가시티의 뼈대인 광역교통망 구축과 지역 신산업 육성, 네트워크 구축 등을 추진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