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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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권’ 탄소발생 확 줄인다지만… 지재권 침해 부작용 우려도 [연중기획 - 지구의 미래]

이재명이 쏘아올린 ‘수리권 법제화’

일반인이 전자제품 수리 접근 쉽도록
증 장기화 요청·수리업체 선택 권리
李후보 “전자제품 수명 1년 연장 땐
탄소배출 400만t 저감 연구결과 있어”

美·유럽 등 전세계선 이미 도입 활발
폐기물 감축 넘어 기기 수명연장 초점
스마트폰 수리 제품설계 공개 불가피
개인정보·영업 비밀 유출 위험 지적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최근 43번째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수리권’을 꼽으면서 ‘이게 뭐지?’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생소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와 달리 유럽과 미국에서는 수리권을 논의하거나 도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친환경적이면서 소비자 중심 정책으로 여겨져서다. 말 그대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를 뜻하는 수리권은 유럽연합(EU)에서 폐기물을 줄이자며 대형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이후 일반 전자기기, 자동차, 의료기기, 농기구, 일반 생활용품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후보는 지난 9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휴대폰·노트북 등 전자제품 수명을 1년 연장하면 자동차 200만대가 배출하는 400만t의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생활용품 수명만 연장해도 탄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요 생활용품의 소모성 부품 보유, 판매기간을 현행보다 늘리거나 새로 도입하겠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수리권이 공론화를 넘어 법제화까지 진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자기기 수리로 가까워지는 탄소중립

 

수리권은 △수리 보증을 장기간 요청할 수 있는 권리 △수리 방식 및 업체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수리에 필요한 부품과 장비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수리가 용이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모두 포함된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수리권을 개념화한 곳은 EU이다. EU의 수리권은 폐기물 감소, 나아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발전했다. 2020년 유엔의 ‘세계 전자폐기물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 세계에 버려진 전자폐기물은 5360만t에 달한다. 5년 전에 비해 21% 증가했는데 이 중 17.4%만 수집·재활용됐다. 한국은 81만80004t(1.5%)을 배출했다. 국민 1인당 연간 15.8㎏을 배출한 꼴이다. 전 세계 기준으로는 7.3㎏이다.

폐기물 발생만 문제가 아니다. 유럽환경국(EEB)은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 수명을 3년에서 4년으로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연 210만t의 이산화탄소를 저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스마트폰 생산공정에서 많은 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EEB에 따르면 스마트폰은 사용 과정에서 28%, 생산·유통·폐기 과정에서 72%의 지구온난화지수 요인이 발생한다. 제품 사용보다 생산부터 폐기까지 사전·사후 과정에서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치는 온실가스 배출 등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세탁기(75%), 청소기(79%) 등 다른 전자제품도 마찬가지다.

 

◆유럽과 미국에 부는 수리권 법제화 바람

 

결국 폐기물 발생 감축을 위해 전자폐기물을 줄이는 것은 물론 사용 중인 전자기기의 수명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 EU의 결론이다. EU는 ‘순환경제행동계획’을 수립하고 회원국들에 전자제품 수명을 연장하고 손쉬운 수리가 가능하게 제조하도록 권고했다.

 

특히 프랑스는 EU 내에서도 강력한 수리권 관련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프랑스 내에서 판매되는 스마트폰, 세탁기, TV, 컴퓨터, 잔디 깎는 기계 5종 전자기기에는 ‘수리가능성지수’를 표시해야 한다. 제품의 분해 용이성, 수리 정보 접근성, 예비 부품 가격 등을 고려해 1∼10 범위에서 수치를 표기하는 방식이다. 영국은 일부 전자기기에 한해 예비 부품을 최장 10년까지 제공하도록 법제화했다.

 

미국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 경제에서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 이 명령에는 제조업체나 제조업자가 제3자 수리에 부과하는 불공정한 제한을 방지할 규칙을 수립하겠다는 방침이 포함됐다. 이미 지난해 3월 기준 미국 25개 주에서 수리권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었다. 대부분 제조업체가 독점하는 수리 관련 정보와 부품을 사설 수리업체에도 제공하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탄소중립만 바라볼 수 없는 수리권 이면

 

미국의 이런 정책은 제품 수리에 너무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사회적 배경이 영향을 줬다. 박소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미국의 경우 수리권이 권리 보호 측면에서 수리권 확보로 논의가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논의가 뜨거운 기종은 스마트폰이다. 수리를 위해 제조사는 제품 설계를 일부 공개하거나 보안 잠금 또는 보안 재설정에 필요한 문서와 도구, 부품 등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설 수리업체에 제품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도록 하면서 저작권 침해와 영업 비밀 유출 문제 등의 부작용이 예상돼 논란이다.

 

현대사회는 스마트폰으로 각종 정보를 처리하고 가정 내 전자기기까지 조정할 수 있어 지식재산권 침해와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수준의 보안 규정을 고집하는 애플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수리보다 리퍼(교환) 정책을 우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 이후 자신들이 공인한 수리업체에 교육과 부품, 매뉴얼 등을 제공하고 해당 업체가 수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시행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국내에도 지식재산권 보호와 개인정보 노출 위험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수리권 관련 조사보고서를 작성한 김경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폐기물 축소와 탄소중립이 중요하지만, 사회에서 보장해야 하는 지식재산권 등의 다른 가치를 보호할 방법도 필요하다”며 “환경이 충돌하는 가치를 품을 수 있어야 탄소중립이 산업구조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