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 공약을 쏘아 올려 수많은 탈모인의 환영을 받자 주요 대선 후보들이 다양한 건강보험 적용·확대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 후보는 탈모에 더해 ‘치아 임플란트 건강보험 확대’ 공약까지 추가했고, 국민의힘 윤석열·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도 각각 당뇨 혈당측정기 비용, 정신과 치료비용 등 다양한 건강보험 지원 공약을 내놓고 있다. 탈모나 혈당 관리, 정신건강 문제 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용 부담 없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건강보험 재정은 한정돼 있어 모두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래서 이는 ‘무엇을 먼저 건보에 적용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탈모 등 잇따라 건강보험 확대 공약
21일 각 당에 따르면 건강보험 보장 강화 공약은 이 후보가 먼저 치고 나왔다. 이 후보는 “탈모인이 겪는 불안·대인기피·관계 단절 등은 삶의 질과 직결되고, 일상에서 차별적 시선과도 마주해야 하기에 결코 개인적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며 탈모 치료 약과 중증 치료용 모발이식의 건강보험 적용 확대를 공약했다. 현재 원형탈모증과 M자 탈모로 불리는 안드로젠탈모증 등 일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는데, 이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탈모 건강보험 적용에 연 700억∼1000억원 정도 재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 후보는 ‘만 60세부터 2개, 65세부터 4개까지’라는 내용의 임플란트 건강보험 지원 공약도 내놓았다.
이에 맞서 윤 후보는 임신성·성인 당뇨 환자에게 연속혈당측정기 비용을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연속혈당측정기는 5분마다 혈당을 측정해 실시간 혈당치와 혈당 추세를 그래프 등으로 기록해 주는 기기다. 잦은 혈당 측정으로 손가락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은데, 연속혈당측정기는 당 변동 폭이 크고 저혈당이 빈번한 당뇨 환자들 치료에 도움을 준다. 현재 1형 환자에 대해서만 연속혈당측정기를 지원(84만원)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 공약에 필요한 재원을 982억원으로 추계했다.
안 후보는 ‘정신건강 국가책임제’를 공약으로 발표하면서 건강보험으로 정신과 치료비를 90% 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안 후보는 “국민 4명 중 1명은 일생에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경험한다”며 “탈모보다는 정신건강 이 더 많은 사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공약에 연 3452억원, 최근 3년간 정신질환 진료비 증가율 8.7%를 고려해도 연 5000억원 규모로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필요하다고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각 후보의 공약대로 실제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추산액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환자 수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수요가 더 늘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각 후보의 공약이 건강보험 재정에 파탄을 일으킬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2020년 국민건강보험통계연보를 보면 건강보험 급여로 65조2916억원이 지출됐다. 최대치로 잡아도 탈모는 전체 지출의 0.1%, 연속혈당측정기는 0.15%, 정신건강은 0.8% 수준이다.
그러나 해당 공약의 수혜 대상 외에도 많은 사람이 다양한 사정으로 겪는 고통과 스트레스 탓에 들어가는 비용 부담이 작지 않은 상황에서 형평성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이들의 지원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건강보험 재정은 턱없이 부족해진다. 결국 건강보험료율이 올라가고 온 국민의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 생명·건강 위험과 직결돼 정작 지원이 더 절실한 사람들이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따져봐야 할 것은 해당 질환에 대해 이 정도 지출이 필요한지, 같은 규모의 돈을 지출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 여부다. 한 해 3000억∼5000억원 정도 건강보험 재정이 지출되는 질병은 노년백내장(5782억원), 오십견 등 어깨병변(5768억원), 담석증(3478억원), 조현병(3180억원) 등이다. 700억∼1000억원대 지출은 수면장애(1072억원), 알코올성간질환(981억원), 담낭염(820억원), 알츠하이머병(788억원), 통풍(717억원) 등이다. 이들 질병처럼 보장이 필요한지는 별도로 세심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세라 서울시의사회 부회장은 “필수적이지 않은 곳에 건강보험 재정이 지출되면 더 필요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국민에게 필요한 걸 전부 다 할 수 없다”며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질환,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는 병에 돈을 더 투자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먹으면 살 수 있지만 억대 고가 약이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희귀질환에 투입해 생명을 살리는 게 먼저라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건강보험 적용이 논의 중인 말기 혈액암 치료제 ‘킴리아’의 경우 가격은 5억원 수준(미국 가격)이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면 환자 부담은 크게 내려온다. 임상시험에서 한 번만 투약하면 50∼80% 이상이 완치되는 결과가 나왔다.
백민환 한국다발골수종환우회장은 “희귀, 중증 난치성 질환자들은 여전히 건강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게 현실”이라며 “탈모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백 회장은 “질환별로 꼭 필요한데 한 달에 1000만원 넘게 드는 약이 적지 않다”며 “정책적으로 우선시돼야 할 것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제약사 신청후 약평위서 임상 유용·비용 분석
약이나 의료서비스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몇 단계 절차를 거쳐야 가능하다.
21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먼저 제약사 등의 등재 신청이 있어야 한다.
신약의 경우 정부는 임상적 유용성, 급여 기준, 비용 효과성 등을 판단한다. 대체 가능성이 있는지, 질병을 낫게 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진료상 꼭 필요한지 등을 분석한다. 비용 대비 효과가 큰지에 관한 경제성 평가도 거쳐야 한다. 건강보험 급여 적용 시 건강보험 재정 상태도 당연히 고려 대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약평위)가 급여 적정성 심의를 한다. 급여 적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고, 약값을 낮추면 가능하다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약가 협상이다. 이는 건강보험공단이 담당한다. 제약사와 건강보험 재정·환자 부담의 적정 수준 및 상한 금액을 결정한다.
이들 절차를 모두 마치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약의 건강보험 적용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건정심은 복지부 제2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며, 근로자·사용자·시민단체·소비자·농어업·자영업자 등 가입자 대표 8명과 의료계·약업계 8명, 정부와 전문가 등 공익대표 8명으로 구성된다.
신약은 신청에서 등재까지 약 240일, 복제약은 약 60∼90일, 최대 150일 정도 걸린다. 건보 적용 이후에도 의약계와 환자단체 요구 등을 검토해 급여 기준을 조정한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의약품은 최근 4년간 4499개 증가했다. 매년 신규 등재와 보험급여 청구실적이 없는 등의 의약품 급여 제외가 결정되면서 급여의약품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2017년 2만399개에서 2019년 2만901개로 줄었다가 2020년 2만3589개, 지난해 2만5798개로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