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화하면 전 세계 식량 가격이 폭등해 ‘제2의 아랍의 봄’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과 러시아 간 외교수장 담판 결과는 빈손에 그쳤다. 영국이 러시아를 맹비난하면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22일(현지시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시 식량 안보 문제가 불거져 그 여파가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뻗어 나갈 것이라고 관측했다. 우크라이나는 2020년 기준 2400MT(메트릭톤)의 밀을 수확해 1800만MT를 수출한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이다. 주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밀이 대거 생산되며, 러시아의 공격이 있을 시 생산량 급감은 불가피하다.
FP는 밀 소비의 10% 이상을 우크라이나산에 의존하는 국가는 대체로 14국 정도인데, 레바논과 리비아, 예멘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나라가 포함돼 있다고 소개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자료에 따르면 레바논은 2020년 기준 전체 밀 소비량의 절반이 우크라이나산이다. 리비아와 예멘은 각각 전체 밀 소비의 22%, 43%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한다. 그 외의 나라에서 우크라이나산 밀 소비 비중은 각각 이집트14%, 말레이시아 28%, 인도네시아 28%, 방글라데시 21%에 달한다.
밀 가격이 오르면 식료품 가격이 전체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급속한 물가 상승에 따른 민심 요동이 불가피하다. 밀 가격 급등이 중동 국가 국민의 불만을 부추겨 ‘아랍의 봄’으로 번진 2010년 말과 2011년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더라도 걱정은 마찬가지다. FP는 “식료품 가격 상승 등 인플레이션은 반정부 심리를 강화한다”며 카자흐스탄 사례를 들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이달 초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이 급등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러시아와 서방 간 긴장감은 좀처럼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지만 이견만 되풀이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가능성을 포함해 협상을 이어가기로 하면서 일촉즉발을 모면한 상황이다. 1시간30분간 이어진 회담에서 미국이 러시아의 제안에 대한 서면 답변을 주기로 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블링컨 장관은 회담 뒤 단독 기자회견에서 “오늘 주요한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면서도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우려와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분명한 여정에 있다”고 평가했다. 블링컨 장관은 필요하다면 미·러 정상이 만날 준비가 돼 있다고도 설명했다.
스푸트니크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외무부는 미·러 외교장관 회담 후 배포한 성명에서 “(라브로프 장관이) 블링컨 장관에게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이 우리의 합법적인 우려를 무시하는 것, 무엇보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이 러시아 국경 근처에 병력과 무기를 대규모로 배치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면서 “만약 미국이 안보 보장에 관한 우리의 합의 초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를 향해 비난 수위를 높였다. 22일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인사들과 접촉해 친러시아 인사로 우크라이나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정치인 5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중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는 예벤 무라예프 전 국회의원이 꼽힌다. 무라예프는 2019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소속 정당이 득표율 5%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의원직을 잃은 인물이다. 러시아 외교부는 “영국 외무부가 헛소리를 퍼뜨리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