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경부선을 타면 명품 전시들이 기다린다. ‘유고전이 된 거장전’이라는 사연을 안게 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개인전이 열리는 부산시립미술관부터, 역병의 시대 돌봄의 가치를 성찰하게 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 경남도립미술관, 화려한 개막을 알려 미술계 입소문이 자자한 울산시립미술관까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놓인 공공미술관들이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마침 문화공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역시 의미가 남달라 놓치면 아깝다. 국토의 남쪽 끝, 봄이 먼저 오는 곳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들의 활기가 다가오는 봄의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볼탕스키 - 죽음을 말하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생전 마지막으로 준비한 전시이자 타계 후 첫 유고전이 국내에서 열리게 됐다는 건 ‘슬픈 행운’이다. 부산시립미술관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전시 얘기다. 이 미술관의 연례전인 ‘이우환과 그 친구들’의 세 번째 시리즈로, 이우환 화백의 실제 절친한 친구였던 볼탕스키의 개인전이다. 작가가 평생 다뤄온 화두인 죽음을 주제로 엄선된 43점이 전시장에 펼쳐진다. 1944년 나치에서 해방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프랑스 파리,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후세대의 트라우마를 다뤄온 가장 위대한 프랑스 현대미술가로 꼽힌다. 대표적 ‘쇼아(Shoah : 히브리어로 ‘참사’ ‘대재앙’이라는 뜻으로 홀로코스트를 의미) 작가’로도 불린다.
전시에선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1986년 작품 ‘기념비’를 비롯해, 1969년 아방가르드 단편 영화 ‘기침하는 남자’ 등을 볼 수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일까, 죽음 이후는 어떤 세계일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까, 죽음에 대한 평생 성찰의 깊이가 작품들 속에 베어있다. 십자 모양으로 배열된 4개 스크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평화로운 풍경 영상이 진행되고, 그 사이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등 20세기 인류의 잔혹행위 참상이 ‘24분의 1초’라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속도로 스쳐지나가는 작품 2020년 작 ‘잠재의식’도 강렬하다.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알아차렸던 걸까. 전시 준비과정에서 그가 유독 모든 절차를 서둘렀다고 한다. 미술관 측은 전시 디자인을 서둘러 모두 마무리하고 부대 행사 프로그램으로 이우환 화백과 인터뷰를 진행하려 했던 지난해 7월 14일,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제서야 그가 서두른 이유를 짐작했다. 기혜경 관장은 “볼탕스키의 마지막 예술적 영혼이 들어간, 다시는 볼 수 없는 전시”라고 말했다. 이우환의 볼탕스키 인터뷰는 끝내 진행되지 못했지만, 미술관은 대신 이우환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도록에 실었다. 이우환은 “저는 작가님의 작품을 접할 때면 인류의 운명으로까지 생각이 나아갑니다”라며 “너무 추상화되고 수치화되어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오늘날의 죽음을 어떻게 보는지 여쭙고 싶다”고 썼다.
전시 마지막 순서에 만나는 타계 직전의 신작 ‘설국’(2021)은 전시의 백미다. 매끈한 흰 방 안에, 병상 침대 시트가 연상되는 하얀 천이 겹겹이 뒤엉켜 무덤이 됐다. 천장에는 지극히 인공적이고 위생적인 흰 빛을 발산하는 조명이 달려있다. 최첨단 병원에서 쓰이는 긴 호스처럼 보이는 조명은 문장처럼 보여서 무언가 읽어내야 할 몸짓처럼 보인다. 3월27일까지.
◆문성식 - 삶을 말하다
부산의 또다른 미술 공간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문성식 개인전의 제목은 ‘Life 삶’이다. 마침 1980년생 젊은 스타 작가의 주제가 삶이라 볼탕스키 전시와 묘하게 대조된다. “소박하게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을 소소하게 기록하겠다”는 작가의 생각을 담았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바르고,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스케치해 표면을 긁어내듯 작품을 만든 작품 약 100점을 선보인다. 유화도, 드로잉도 아닌, 일명 ‘유화 드로잉’이다. 전시장엔 봄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가 폭포, 산, 꽃, 정원과 같은 자연을 소재로 했기 때문일까. 캔버스 위로 슥슥 지나간 연필 자국들은 녹고있는 땅 위로 올라오는 꽃가지 같고, 그 위로 가볍게 칠해진 구아슈(과슈) 물감의 포근한 색채는 봄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말 중 연필을 고집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연필은 가장 기본적 재료, 장식성 없는 재료다. 장식을 제거하고 가장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드러나게 해주는 재료다. 즉흥적이며 소박하고 과장 없고 꾸밈없는 제 성격과 닮은 것 같다.” 2월28일까지.
◆의식주에 담긴 희로애락
국제갤러리 옆 F1963석천홀에서는 설립 20주년을 맞은 아름지기 재단의 ‘CONNECTING 아름답게, 전통을 이어 일상으로’전이 한창이다. 재단 설립 이후 매년 선보인 스무 번의 전시를 압축해 하이라이트를 모은 특별전이다. 재단은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전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발해 나간다는 목표로 복원과 현대화, 두 방법을 오가며 활동을 벌여온 곳이다. 전시에는 전통을 구현하는 연구원과 기능장, 또 현대화하는 디자이너 등 90명의 작품 약 400점을 의·식·주 세 카테고리로 나눠 보여준다. 특히 전통미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창의력을 가미해 재탄생시킨 작품, 실용적 작품들이 빛난다. 가령 최종화 작가의 ‘벽걸이 소반’은 실제 조상들이 소반을 벽에 걸어두었다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벽을 장식한 액자처럼 납작하게 접어 걸어둘 수 있는 작은 상이다. 우리 전통 제수용기들을 현대화한 ‘아파트 제사상’ 프로젝트, 노마드 제사상, 제사 키트 등도 눈길을 끈다. 2월13일까지.
◆경남도립·울산시립미술관
부산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경남도립미술관의 ‘돌봄사회’전은 진작에 입소문을 탔다. ‘관람객 울리는 작가’ 문지영의 ‘가장 보통의 존재’, ‘엄마의 신전’ 연작을 비롯해 미하일 카리키스, 요한나 헤드바, 임윤경, 조영주, 최태윤의 드로잉, 회화, 영상 등 40여 점을 선보인다. 그간 코로나19와 관련해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미술 전시들이 죽음, 또는 주변인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주제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남도립미술관은 다소 뻔한 주제를 벗어나 팬데믹 국면 속 돌봄의 사각지대를 주목한다. 학교가 문을 닫자 생겨난 취약계층 아이들, 집단감염에 고스란히 노출됐던 각종 보호시설과 교정시설 등 재난의 위험은 돌봄이 무너진 자리에서 가장 위협적임을 우리는 목도했다. 전시는 돌봄의 가치, 돌봄의 역사 등 돌봄을 둘러싼 사유를 확장하고, 인간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상호의존은 곧 삶의 전제조건임을 깨닫게 한다. 2월6일까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또 한 시간을 달리면 울산시립미술관이 대대적으로 벌인 개관전을 볼 수 있다. 개관특별전 ‘포스트 네이처 : 친애하는 자연에게’ 등 5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개막특별전에는 백남준 등 국내외 미디어아티스트 17명이 참여했다. 산업수도 울산의 정체성을 담아 기술과 자연이 융합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4월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