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문재인 대통령의 ‘문재인정부 적폐청산’ 발언에 대한 공개 사과 요구에 대해 10일 “문 대통령과 저는 (법과 원칙에 대해)같은 생각”이라며 “윤석열 사전에 정치 보복은 없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는 윤 후보를 향해 “저열한 전략이다”며 공세 수위를 끌어 올렸다.
대선 D-27일을 앞두고 청와대가 ‘선거 개입’ 논란을 무릅쓰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소환한 이례적인 ‘정치 보복’ 프레임을 두고 여권 지지층 결집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야권은 강경 대응 속 수위 조절에 나섰다.
윤 후보는 이날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열린 재경 전북도민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적폐 청산 발언에 대해 문 대통령이 사과를 요구했다’는 기자들의 질의에 대해 “문 대통령께서도 늘 법과 원칙에 따른,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해왔다. 저 역시도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해서는 늘 법과 원칙, 공정한 시스템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려왔다”며 “문 대통령님과 저는 똑같은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건 제가 검찰에 재직할 때나 정치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란이 된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과 관련 수사를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지휘해 온 윤 후보는 과거 문 대통령이 자신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면서 한 “권력형 비리에 대해 정말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자세로 아주 공정하게 처리해 국민의 희망을 받았는데 그런 자세를 끝까지 지켜주기 바란다”는 발언을 상기시키며 문 정부의 적폐청산 수사는 문 대통령이 강조한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였음을 강조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집권하면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해야죠”라고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답한 윤 후보의 발언을 문제 삼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 재직 때에는 이 정부의 적폐가 있는 데도 못 본 척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없는 적폐를 기획사정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것인가. 대답해야 한다”며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불법으로 몬 것에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윤 후보는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권에서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도 법에 따라, 시스템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윤 후보는 이어 “집권 시 정치 보복을 하지 않겠다. 제가 당선되면 어떤 사정과 수사에도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지난해 여름부터 말씀드렸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해찬, “尹, 노무현 모해에 일조”…당·청, ‘정치보복’ 프레임 공세
여권의 ‘정치 보복’ 프레임 확산과 총결은 전날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글에서 시작됐다. 이 대표는 전날 이재명플러스 앱에 올린 ‘윤 후보는 또 누구를 모해하고 악어의 눈물을 흘리려 하느냐’는 제목의 글에서 “오늘 윤 후보는 문재인 정부에 정치 보복을 선언했다. 기가 막힌다. 어찌 5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검찰과 감사원, 보수언론에 시달리고 K-방역과 G10 국가를 향해 여념 없이 달려온 문재인 정부에 적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이 전 대표는 윤 후보가 제주 강정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며 울컥했던 모습에 대해 “이 눈물을 믿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윤 후보는 이명박 정부가 야인으로 소박하게 살아가시던 노 전 대통령님을 모해하고 탄압할 때, 그의 가족을 수사한 사람이었다”며 “그 정치보복으로 노 전 대통령을 모해하는 데 일조했던 윤 후보가 문 정부를 상대로 정치보복을 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어 윤 후보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성토했다.
이 전 대표의 메시지 후 민주당은 긴급 선대위 회의를 소집했다. 우상호 총괄선대본부장은 전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의 우려가 현실로 확인됐다. 윤 후보는 정치보복 발언을 취소하고 국민 앞에 사과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청와대도 전날 핵심 관계자의 입을 빌려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날 문 대통령이 직접 윤 후보의 사과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작성하면서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치보복 공언하는 대선 후보는 헌정 사상 처음이다”며 “검찰 책임자로서 눈 감았던 적폐가 있다는 의미든, 없는 적폐를 조작하겠다는 뜻이든 모두 심각한 문제고 국민 모독”이라며 윤 후보의 사과를 촉구했다.
◆尹, “원론적 발언”→“정치 보복 없다” 수위 조절했지만…野, “선거 개입” 공세
윤 후보는 전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새 정부가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전 정부 일이 1, 2, 3년 지나며 적발되고 정상적인 사법 시스템에 따라 (수사가) 이뤄지게 돼 있다는 원론적인 말씀을 드린 것”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청와대와 민주당의 격앙된 반응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제 될 것이 없다면 불쾌할 일이 없지 않겠나”라고 반문하며 청와대와 여권의 발끈 대응을 비판했다.
다만 선대본부 내부에서도 윤 후보의 중앙일보 인터뷰 내용에 대한 우려와 부정적인 파장에 대한 우려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윤 후보는 전날까지는 ‘적폐청산을 하겠다’는 발언이 아니라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겠다”고 말한 점을 강조하며 문 대통령이 아닌 문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의 문제를 지적한 취지라고 설명했다고 복수의 관계자들이 전했다.
윤 후보 측은 이날 오전 문 대통령의 공개 발언으로 전선이 ‘윤석열vs이재명’에서 ‘윤석열vs문재인’으로 확전되자 메시지 수위 조절에 나섰다. 이양수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윤 후보는 평소 소신대로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법과 원칙 그리고 시스템에 따른 검찰의 엄정한 수사 원칙을 강조했다”며 “문 대통령이 석열 대선후보를 향해 사과를 요구한 것은 명백한 선거 개입 시도다”고 성토했다.
◆‘적폐청산’ 1호 공약 내세웠던 文…정권교체 위기감의 발로? 반이·친문 결집 신호탄?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 발표한 383쪽짜리 공약집에서 1호 공약을 적폐청산으로 내걸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조사와 이를 막을 적폐청산특별위원회 설치를 공약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적폐청산의 기치 아래 반부패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으며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4대강 감사, 방산비리, 국정교과서 폐지 등 전 정권에서 이뤄진 중요 의사결정에 대한 감사·수사가 정권 내내 이뤄졌다.
문 대통령의 윤 후보를 향한 분노는 집권의 1호 명분이었던 정권교체의 가치가 훼손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적폐청산과 검찰개혁으로 이어진 일련의 흐름은 문 대통령이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운 가치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윤 후보의 지지율이 이 후보를 앞서는 여론조사가 이어지면서 정권교체에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문 대통령과 여권의 위기감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의 직접 개입은 이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친문(친문재인) 성향 여권 지지층의 결집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문 대통령과 여권의 강한 반발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등 청와대가 개입된 관련 권력형 비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중도층과 보수층에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