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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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안전한 화장실’ 누리는 세상 꿈꿔요” [차 한잔 나누며]

‘AI로 불법촬영 예방’ 한수연 유니유니 대표

피해 두려움이 ‘쌔비’ 개발 원동력
딥러닝 기반 단말기 2021년 상용화
카메라 설치 땐 자동 경보음·신고
범죄 원천 차단… 公기관 등 호응
응급구조·위생 관리 등 기능 확장
사각지대 없는 안심서비스 만들 것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유니유니 사무실에서 한수연 대표가 ‘쌔비’ 개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모든 일은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낯선 곳에서도 오롯이 혼자만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불법촬영범죄 예방 시스템 ‘쌔비(Savvy)’를 개발한 한수연(30) 유니유니 대표에게 화장실은 일종의 쉼터였다. 여느 때처럼 화장실에 앉아 창업 아이템을 생각하다 불법촬영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한 대표는 “재학 중인 대학 근처 지하철역 화장실에도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면서 화장실이 더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여성이자 두 여동생의 언니인 한 대표에게 화장실 불법촬영범죄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엔 화장실에 가는 게 두려워졌다가 나중에는 ‘왜 내가 조심해야 하지’란 생각이 들었다”면서 “전공인 컴퓨터공학을 살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 끝에 ‘쌔비’를 개발하게 됐다”고 했다.

 

인공지능(AI)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한 ‘쌔비’는 불법촬영을 시도하는 행동을 비식별 데이터로 탐지하고 경보음 신호와 함께 경찰 신고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한 단말기다. 불법촬영 범죄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도록 한다는 취지다.

 

그는 ‘쌔비’ 개발 과정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불법촬영 범죄자들이 운영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는 “불법촬영범죄 특성상 피해 영상은 매우 많지만 피해자는 피해 사실조차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면서 “범죄 패턴을 수집하기 위해 가입했는데, 가해자들이 범죄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불법촬영용 카메라 판매업자, 여성·청소년과 경찰 등을 만나가며 데이터를 수집했다.

 

이화여대 컴퓨터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대표는 2020년 8월 유니유니를 창업하고 본격적인 ‘쌔비’ 개발과 회사 운영에 나섰다. 불법촬영 예방뿐 아니라 쓰러짐 감지 등 응급환자 구조와 화장실 위생·소모품 관리 등 다양한 기능도 개발 과정에서 추가했다. 시범운영 등을 거쳐 지난해 10월 상용화된 ‘쌔비’는 현재 서울 은평·성동구청, 인천 연수구청 등 공공기관과 민간 음식점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평범한 ‘청년 창업가’처럼 보이는 한 대표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가 본 대학수학능력시험만 7번, 다녔던 대학도 4번째다. 전공도 의류상품학, 중국어 통번역학, 간호학으로 다양했다. 이대에는 환경공학도로 입학했지만 전과를 통해 컴퓨터공학도가 됐다. “중학생 때 남동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뒤로 스무 살 때까지 ‘공부 포기자’였어요. 그러다 막둥이 남동생이 태어났고, 그때부터 공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스스로 돈을 벌었던 경험은 한 대표가 자신 있게 창업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과외를 8개씩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수능 공부를 했어요. 백화점에서 한우 판촉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직원 제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에서 제가 ‘돈을 잘 벌고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그래밍 동아리와 교내 창업경진대회 역시 한 대표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쌔비’를 개발하게 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는 창업을 꿈꾸는 대학생이나 청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길 권했다. 한 대표는 “팀 프로젝트처럼 작은 일에서부터 리더 역할을 하면서 조직을 이끄는 경험, 아르바이트와 대학축제를 통해 돈을 벌어보는 경험이 창업에 큰 도움이 됐다”면서 “자기 사업을 한다는 건 포기할 부분도 많지만 세상을 더 크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표의 목표는 2031년까지 혈우병(혈액 응고인자 결핍증) 환자와 희귀질환자, 세계화장실협회에 총 1004억원을 기부하는 것이다. “화장실은 오염된 물로 인한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들을 살리는 역할도 하더라고요. 불법촬영 문제로 시작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사각지대 없는 안심서비스를 만들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