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대미 무역 100억∼200억달러 흑자
한·미 FTA가 발효되기까지는 협상 타결 후 4년 11개월이 걸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신년연설에서 “한국경제의 마지막 승부수이며 도약의 계기”라며 “정치적 부담은 크지만 이건 하고 가자”고 한 후로부터는 6년 3개월이다. FTA를 둘러싼 갈등의 강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FTA 비준안 통과 과정에서 국회에는 해머와 최루탄, 소방호스가 등장했다. 여당의 ‘날치기 통과’도 재현됐다. 체급 자체가 다른 미국에 시장을 여는 모험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2012년 3월 15일 한·미 FTA가 발효되자 미국 수입품 9061개(전체의 90.5%), 한국 수출품 8628개(82.1%)의 관세가 즉시 철폐됐다.
이후 10년간 대미 교역 규모를 보면 한·미 FTA 성적은 합격점이다. 7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2년 1018억달러였던 대미 무역 규모는 2019년 1352억달러로 늘었다. 이듬해에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1316억달러로 내려왔으나 지난해에는 한국이 ‘무역 신기록’을 쓰면서 대미 교역도 1691억달러로 뛰었다.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2012년 152억달러에서 2015년 258억달러까지 늘었다. 그러나 2018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의 재협상 요구로 흑자 규모는 다시 100억달러대로 내려왔다. 2020년 대미 무역흑자는 166억달러, 지난해에는 227억달러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강구상 미주팀장은 “한·미 FTA로 제조업 고용과 실질임금이 증가했으며 특히 대미 수출이 늘어난 산업의 중소기업에서 고용과 실질 임금이 증가한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양허 품목 점유율 확대… 자동차 가장 큰 수혜
무엇보다 ‘미국과 자유무역하면 시장을 다 뺏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딛고 무역장벽을 없앴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한국은 중견국과의 FTA를 먼저 고려했다. 협상력 차이 때문에 미국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산업연구원 김수동 통상정책실 연구위원은 “미국보다 경제력이 약한 국가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시도하는 건 큰 모험이고 상당히 무모한 측면이 있었다”며 “미국이라는 큰 상대를 처음 맞닥뜨리면서 부담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넘어서자 한국이 자유무역국가로서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했다. 한·미 FTA라는 큰 벽을 뛰어넘자 이후 다른 국가와의 FTA 협상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한·미 FTA는 양국 수출입품의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산업연구원의 ‘FTA 15년의 제조업 업종별 성과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한·미 FTA 발효 후 2018년까지 미국에서 수출점유율이 상승한 한국 제조업 품목은 1619개로 전체 대미 수출액 중 54.3%였다.
특히 수혜를 본 업종은 대미 수출 1위 품목인 자동차다. 산업연구원은 “FTA 발효 이후 대미 수출 동향은 자동차 수출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2012년 106억달러이던 자동차 대미 수출액은 2015년 176억달러까지 늘었다. 이후 미국 시장에서 경량트럭 선호가 높아지면서 수출액이 줄어 2020년 158억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자동차의 한국 진출도 늘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0년 미국계 자동차는 한국에서 4만6000대(15.2%)가 팔리며, 2만1000대(7%)인 일본계를 제치고 독일계(61.9%)에 이어 2위에 올랐다.
FTA는 혁신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강 팀장은 “한·미 FTA 발효 후 한국 기업의 미국 특허출원 건수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경향”이라며 “특히 반도체, 자동차 대기업의 특허 출원이 느는 등 제조산업에서 혁신이 많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위원은 “미국이 요구한 높은 수준의 무역, 통상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제도, 법령, 시스템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정해야 했다”고 평가했다.
◆농축산 분야 피해 ‘그늘’
한·미 FTA의 그늘도 존재한다. 10년 전 대표적으로 꼽힌 피해 예상 업종은 농축산업과 식품·제약·방송·영화 분야다. 이 중 농축산업의 피해는 현실화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2년 43억4000만달러였던 미국 농산물 수입은 2020년 54억100만달러로 늘었다. 이 기간 한국 농산물의 대미 수출은 4억4100만달러에서 10억3700만달러로 증가했다.
미국 축산물 수입은 더 극적으로 늘었다. 2012년 14억1100만달러에서 2020년 28억5300만달러까지 뛰었다.
반면 정부의 농가 피해 보전은 물음표가 제기된다. 피해 지원책이 기존 정책들과 중복돼 지원규모가 과장됐고 기존 농정사업과 차별성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한·미 FTA 농업피해 지원금액이 10년간 23조1000억원이라고 발표했으나 이는 한·칠레 FTA용 9000억원이 포함된 수치였다.
농가 피해 지원 사업에 1960·70년대부터 시작한 수리시설 개보수, 배수개선 등 기존 예산 사업이 포함된 것도 문제였다. 98개 사업 중 한·미 FTA 피해 대책이 시행된 2008년 이후 도입된 신규 사업은 41개에 그쳤다.
강 팀장은 “정부 차원에서 농가 피해 지원안을 내놓았으나 농가에서 정보가 적어 신청 건수가 많지 않았다”며 “피해 보상 신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책정된 예산 대비 집행이 많이 되지 않아 농가 피해를 키웠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여러 국가와 FTA 체결 후 제조업에서도 경쟁력이 없어 사라진 품목들이 있다”며 “대표적으로 냉장고 등 가전 제품 내부 플라스틱 선반은 대부분 국산이었으나 수입산이 워낙 싸게 들어오면서 해당 기업체의 3분의 2가 사라졌다”고 전했다.
산업부에 따르면 FTA 피해 기업을 돕기 위한 무역조정지원기업 지정 건수는 2012년 8건에서 2016년 24건, 2020년 49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22건으로 줄었다.
◆새 과제 던져진 한·미 FTA 미래 10년
한·미 FTA 이후 10년이 시장 개방과 미국 진출이라는 과제를 푸는 시기였다면 최근 통상환경은 다시 급변하고 있다. 경제에 안보가 결합되는 고차 방정식이 던져졌다.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KIAF) 회장은 최근 연 산업발전포럼에서 “글로벌 통상 패러다임이 ‘자유무역 확산’에서 ‘규제·규범과 자국 이익 우선’으로 변화하면서 무역환경이 불투명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 움직임이 미국이 곧 공개할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다. IPEF는 미국이 아시아·태평양 무역질서에서 중국에 주도권을 주지 않기 위해 추진하는 포괄적 경제협력 구상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IPEF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김 연구위원은 “통상에 안보 문제가 결합되면서 미국·서방 중심의 동맹 국가들, 중국 중심의 일부 국가 식으로 공급망, 무역질서가 분절화·그룹화되고 있다”며 “코로나19를 거치며 신념이 다른 국가의 공급망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체험했기에 파트너 국가들과 별도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움직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전략을 만들지가 앞으로 5, 10년 동안 큰 과제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韓, 58개국과 FTA… 멕시코와 협상 14년 만에 재개
한국은 2003년 2월 칠레와 첫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이후 18년간 58개국과 18건의 FTA를 맺으며 무역 장벽을 허물었다. 무역 영토를 넓히기 위한 FTA 협상은 올해도 계속된다.
우선 중남미 최대 교역국인 멕시코와 무역 국경을 지운다.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에서 타티아나 클로우티에르 멕시코 경제부 장관과 14년 만에 FTA 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2007년 8월 포괄적 FTA로 협상을 하기로 했으나 2008년 6월 중단됐다. 이후 여러 차례 재개 시도가 있었으나 멕시코 측이 자국 산업계 우려를 이유로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증폭되는 데다, 한·멕 FTA가 양국에 아시아·중남미 진출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에 전략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멕시코는 홍콩·대만을 빼면 한국의 10대 수출국 중 유일한 FTA 미체결국이다. 한국의 중남미 1위 교역국이기도 하다.
산업부는 자동차 15∼20%, 철강 15%, 냉장고·TV 10∼15% 등 멕시코의 관세율이 높아 FTA 체결 시 수출 여건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2005년 멕시코와 무역협정을 발효한 일본에 대한 상대적 경쟁 열위도 만회할 수 있으리라 봤다. 양국은 한국이 자동차·철강·디스플레이·반도체를 수출하고 멕시코는 원유·광물, 농축산물, 자동차 부품 등을 수출해 상호보완적 무역구조를 갖고 있다.
걸프협력회의(GCC)와도 11년 만에 FTA 협상을 공식 재개한다. 여 본부장은 올해 1월 나예프 알 하즈라프 GCC 사무총장과 한-GCC FTA 공식 재개 선언문에 서명했다.
양측은 2007년 FTA 추진에 합의하고 세 차례 공식 협상을 했으나 2010년 1월 GCC 측이 정책 재검토를 이유로 협상 중단을 선언했다.
GCC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오만, 바레인 6개국의 지역협력기구다. 한국과 중동 지역 교역량의 75%를 차지하는 중요 파트너다. 인구·소득·잠재력 면에서 성장 가능성이 크다. 또 에너지 부국으로서 제조업 육성, 신재생에너지·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이어서 한국과 협력할 여지가 많다.
한국은 매년 GCC를 상대로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 2020년 GCC에 90억달러를 수출하고 377억달러어치를 수입해 287억달러 적자였다. 2014년에는 적자폭이 810억달러에 달했으며 2018년 569억달러, 2019년 484억달러 등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GCC에서 주로 수입하는 품목은 원유(70%), 천연가스(15.8%), 석유제품(8.6%) 등 원자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