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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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러시아 야욕 맞서자"… 핀란드·독일도 ‘밀착’

"제2의 우크라 될래?" 핀란드 겁박한 러시아
독일에 접근하는 핀란드… 러시아 겨냥한 듯
80여년 전 2차대전 당시로 되돌아가는 세계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왼쪽)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두 사람은 오는 16일 독일 베를린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을 논의한다. 마린 총리 SNS 캡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화들짝 놀란 핀란드가 자국 안보를 위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타진하고 나서자 러시아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핀란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토 핵심 회원국인 독일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 1941년 핀란드가 당시 소련(현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나치 독일과 손잡은 것과 비슷한 외교 전선이 80여년 만에 다시 유럽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우크라 될래?" 핀란드 겁박한 러시아

 

러시아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12일(현지시간) 핀란드를 겨냥해 “그간 견지해 온 군사블록 불참 정책이 북유럽 및 유럽대륙 전체의 안보와 안정성 확보를 위한 중요한 요소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군사블록 불참’이란 핀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중립 노선을 지킨 것을 뜻한다. 지금도 핀란드는 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 등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달리 나토 회원국이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핀란드는 기존의 중립 노선을 벗어던지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낸 데 이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는 등 군사원조까지 단행했다. 최근에는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니니스퇴 대통령은 방미 기간 ‘러시아 전문가’로 통하는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만나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대한 비밀 브리핑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 당국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나토와 미국을 비롯한 일부 나토 회원국들이 핀란드를 나토에 끌어들이려 시도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어 “핀란드의 나토 가입은 심각한 군사·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나토 가입을 타진하던 우크라이나가 요즘 러시아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처럼 핀란드도 언제든 러시아군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겁박한 셈이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 등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들이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근교의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회의하는 모습. EU 회원국들은 러시아에 즉각적인 우크라이나 철군을 촉구했으나 러시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마린 총리 SNS 캡처

◆독일에 접근하는 핀란드… 러시아 겨냥한 듯

 

핀란드는 조금도 굴하지 않는 모습이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참석한 산나 마린 총리는 다른 EU 회원국 정상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강력히 규탄하고 즉각적인 철군을 촉구했다. 앞으로도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고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의 EU 회원국 가입을 돕겠다고도 했다.

 

눈길을 끄는 건 마린 총리가 오는 16일 독일 베를린을 방문해 올라프 숄츠 총리과 핀란드·독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점이다. 핀란드 정부는 “마린 총리와 숄츠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유럽의 안보 및 국방 협력 발전, EU의 경제 및 에너지 정책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핀란드·독일 양국이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이며, 특히 두 나라가 유럽 안보를 위해 국방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할 것임을 내비친 셈이다. 앞서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국방력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두고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군사력을 포기하다시피 한 독일의 ‘재무장’ 선언이란 평가가 나왔다.

 

러시아를 공동의 가상적(敵)으로 상정하는 핀란드와 독일의 연대는 러시아 입장에선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 2차대전 도중인 1941년 6월 핀란드는 독일과 손잡고 소련을 공격했다. 당시 독일 총통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어떻게 나치 독일과 손잡을 수 있느냐’고 핀란드를 비난할 이도 있겠으나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소련(현 러시아)의 핀란드 침공으로 벌어진 겨울전쟁(1939년 11월∼1940년 3월) 당시 핀란드군 전사들이 스키를 타고 설원을 이동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80여년 전 2차대전 당시로 되돌아가는 세계

 

소련은 1939년 11월 갑자기 이웃 핀란드를 침략했다. 핀란드는 정규군과 민간인들의 영웅적 저항으로 무려 4개월 동안 버티며 되레 소련군에 치명적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끝내 국력의 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인 1940년 3월 소련에 항복했다. 흔히 ‘겨울전쟁’으로 불리는 이 싸움의 결과 핀란드는 동쪽의 제법 넓은 영토를 소련에 빼앗겼다.

 

핀란드는 당연히 복수를 꿈꿨다. 혼자 힘으론 어렵고 강력한 파트너가 필요했다. 나치 독일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의 적은 동지’라는 옛말처럼 소련을 타도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을 목적에서 눈을 질끈 감고 나치 독일과 행동을 함께했다. 물론 2차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며 핀란드도 나란히 ‘전범국’의 오명을 쓰고 만다. 물론 핀란드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는 영국 등 서방 열강이 ‘정상’을 참작해줘 전후 처리에서 핀란드는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처분을 받는다.

 

이후 핀란드는 국제사회에서 중립을 표방하며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나토 회원국이 아닌 만큼 독일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유럽 안보를 깨뜨리는 잠재적 위협 세력임이 명확해지면서 핀란드와 독일이 다시 가까워지는 현상을 낳았다. 독일의 재무장 선언, 그리고 독일을 향한 핀란드의 접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세계의 시계가 80여년쯤 거꾸로 흘러 2차대전 당시로 돌아가고 말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