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상태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극히 미약한 상태였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택시기사 폭행’ 사건 첫 공판에서 이 전 차관 측은 혐의를 부인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 전 차관 변호인은 “피고인(이 전 차관)은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상대방이 누구인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차량이 운행 중이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항변했다. 폭행 사실은 인정하지만, 당시 만취 상태여서 택시기사가 ‘운전자’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취지다.
국민의힘은 문재인정부 인사인 이 전 차관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운전자폭행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며 즉각 공격에 나섰다.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으로 꼽히는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은 SNS에 “법을 수호하는 법무부 차관이었던 사람의 주취감경 주장을 국민이 이해하기는 어렵다”면서 이른 시일 내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공약인 ‘주취감경 폐지’를 위한 법 개정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했던 아동성범죄자 조두순이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받아 12년 복역 후 출소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던 주취감경 논란이 전직 법무차관의 음주 폭행사건으로 재점화되고 있다. 법조계에선 주취감경 폐지가 형법의 기본원칙인 ‘책임주의’에 어긋난다는 비판도 제기돼 찬반양론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尹 “주취범죄 양형 감경요소서 제외” 약속
윤 당선인은 후보 시절 ‘음주범죄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며 주취감경 폐지를 약속했다. 국민의힘 대선 정책공약집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주취범죄를 양형 감경요소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이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도 윤 당선인과의 후보 단일화 이전인 지난달 4일 “당선 시 정부안으로 음주범죄에 대해 감형 재량권을 둘 수 없도록 형법 제10조를 개정해 주취 감형을 전면 폐지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형법 제10조 제1항은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동법 제2항은 ‘심신장애로 인해 전항(제1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주취감경 자체가 법조항에 명시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주로 만취한 범죄자가 사물 변별 및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면 이 조항에 따라 형이 감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재판부가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형을 감경할 수 있도록 한 형법 제53조(정상참작감경)를 통해 음주범죄자에 대한 감경이 이뤄질 수 있다.
◆특정 범죄에선 ‘만취 심신미약’ 감경인자 반영 안 해
주취감경 폐지를 요구하는 쪽에선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동일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낮춰주는 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음주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충분히 자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기준은 특정 범죄·조건에서 만취 심신미약은 감경인자로 반영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강간살인·유사강간살인·강제추행살인죄 △성범죄 △공무집행방해범죄 △명예훼손범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배포 등 범죄 △주거침입범죄는 고의성 없이 심신미약 상태에서 이뤄졌더라도 만취 시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였다면 감경이 이뤄지지 않는다. 만취상태에서 타인에게 해악을 미칠 가능성이 있었는지는 범행 당시 정황이나 범죄자의 과거 경험 등을 토대로 판단된다.
이 전 차관 사건과 같은 폭력범죄 및 공갈범죄, 체포·감금범죄, 업무방해범죄, 손괴범죄에 대해선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이르지 않은 경우에는 만취 상태를 감경인자로 반영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술에 취했더라도 사물 변별 능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감경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 전과 등이 있다면 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주취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경해주지 않는 성범죄 등보다는 비교적 덜 엄격한 셈이다.
이외의 범죄에선 심신미약 상태가 본인의 책임인지 아닌지에 따라 ‘특별감경인자’ 또는 ‘일반감경인자’로 반영될 수 있다. 만약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걸 예견하고도 술을 마셔 심신장애 상태가 된 경우에는 형법 제10조 제3항에 따라 형의 감경이 이뤄지지 않는다.
◆완전 폐지 위해 법 개정 필요…20대 국회서도 논의됐으나 개정은 안 돼
음주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을 감경요소에서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관련 법을 제·개정해야 한다. 양형위원회에서 모든 범죄에 주취감경이 이뤄지지 않도록 양형기준을 수정할 수도 있으나, 원칙적으로 양형기준은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권고에 해당한다.
현재 국회에는 관련 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돼 있다.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은 지난해 2월 ‘음주로 인해 심신장애를 야기한 사람’과 ‘마약류를 투약해 심신장애를 야기한 사람’은 형법 제10조 제1·2항을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과 서영교 의원도 각각 2020년 8월과 6월 유사한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다만, 일각에선 주취감경을 폐지할 경우 형법상 책임주의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책임주의란 ‘책임이 없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는 형법상 기본원칙을 말한다. 음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가 된 것에 본인 책임이 있는지 또는 음주 전에 스스로 범행을 예견할 수 있었는지 여부 등과 상관없이 모든 주취감경을 배제한다면,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2018년 20대 국회에선 형법 제10조 제2항이 ‘심신장애로 인해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는 필요적 감경규정에서 ‘감경할 수 있다’는 임의적 감경규정으로 개정될 당시 주취감경 폐지 논의도 이뤄졌다. 그러나 음주범죄의 형 감경 여부는 사안에 따라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는 이유로 의결되지 못했다. 당시 관련 논의가 이뤄졌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법원행정처 측은 “심신미약을 임의적(감경규정)으로 하는 정도까지는 수용할 수 있지만, ‘음주·약물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임의적 감경도 할 수 없다’고 기본법에서 정하는 건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고, 법사위원들도 이에 동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