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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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만 봐도 통하는 부부… 무대 위에서도 영원한 사랑의 맹세

유니버설발레단 ‘춘향’ 리뷰

결혼 10년차 손유희·이현준
춘향과 이몽룡역으로 호흡
티끌만한 오차·망설임 없어

작품 속 의상만 170여벌
주인공은 6∼7번씩 환의
한복의 아름다움 전해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부부인 이현준과 손유희가 발레 ‘춘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후’ 파드되에서 열연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이만한 파드되(2인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잃은 줄 알았던 연인이 죽음 앞에서 나타난다. 그간 겪은 고난의 시간을 서로 위로하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절정으로 치닫는 음악에 맞춰 남성 주역은 여성 주역을 번쩍 들어 올려 마치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듯 무대를 가로지른다. 앞에서 쌓은 서사에서 분출되는 주역들의 감정이 고난도 춤으로 음악과 함께 승화된다. 유니버설발레단만의 창작발레 ‘춘향’이 자랑하는 마지막 장면, ‘해후’ 파드되다.

19일 국립극장 해오름 저녁공연에서 만난 ‘춘향’과 ‘이몽룡’은 손유희와 이현준. 결혼 10년 차 부부답게 둘의 파드되는 티끌만 한 오차나 망설임도 없다. 고을 수령 수청을 끝내 거부하다 죽기 직전에 나타난 암행어사. 그의 방에 다시 끌려간 춘향은 또 다른 수청 역시 죽음으로 거부할 작정이다. 고개 들 기력도 없는 춘향 앞에 몽룡의 부채가 슬며시 나타난다. 과거 낙방 후 걸인 신세가 된 줄 알았던 몽룡이 바로 암행어사였다. 전날 감옥에 면회를 와서도 감쪽같이 진짜 신분을 숨겨 절망케 했던 몽룡이 야속해 춘향은 그의 가슴을 때린다. 그러다 결국 다시 찾은 사랑과 행복에 둘은 서로를 그리워했던 마음을 춤으로 찬찬히 풀어내다 격정과 환희, 그리고 포옹으로 마무리한다.

더 큰 무대를 찾아 5년 동안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 부부 무용수는 2007년 ‘춘향’ 초연에도 출연했다. 다만 이현준은 몽룡 역을, 손유희는 향단 역을 맡았다. 드디어 ‘춘향’과 ‘몽룡’으로 만난 무대에서 이현준은 마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쏟아 내듯 연기를 이끌며 부인 손유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갔다.

 

‘춘향’에선 ‘초야’, ‘이별’, ‘해후’로 이어지는 춘향·몽룡의 파드되 반대편에 춘향과 변학도의 춤이 숨어 있다. 기생 점고에서 한차례 춘향에게 수청을 거부당해 잔뜩 화가 난 변학도가 자신의 생일잔치 마당에 끌어낸 춘향과 함께 억지로 추는 춤이다. 가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싸움이다. 너무도 빠르고 격렬한 안무는 보는 이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다른 날엔 몽룡으로 무대에 오르는 강민우가 이날 변학도로 강도 높은 춤을 보여 줬다. 사랑·슬픔 등이 주된 정서인 파드되 세계에서 분노와 욕망, 거부와 고통으로 점철된 보기 드문 춤이다. 만약 이날 무대에서 딱 한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고르고 싶은 대목이다. 마치 파락호처럼 고을 기생들을 농락하는 기생 점고 장면부터 강민우의 연기는 진짜 ‘변사또’ 같다. 카리스마 있는 춤이 더해지면서 발레 무대에서 보기 드문 거친 악당이 탄생했다.

발레극으로서 ‘춘향’이 갖는 매력에선 군무도 빼놓을 수 없다. 1막 마지막은 한양으로 떠나는 몽룡과 비통해하는 춘향을 위한 장면이다. 이정우 디자이너가 만든 먹빛 한복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은 무대로 흘러들어 와 연인을 가로지른다. 마치 성난 강물처럼 거센 이들의 군무가 귀에 꽂히는 음악과 함께 만드는 피날레는 다른 서양 발레에선 보기 힘든 ‘춘향’만의 매력이다. 원래 창작곡이던 ‘춘향’ 음악은 2014년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이 ‘만프레드 교향곡’, ‘조곡 1번’ 등 차이콥스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로 싹 바꿨는데 이 대목도 그렇다. 심포닉 발라드 ‘보예보다(Voyevoda)’에서 발췌했다는 설명이다. “외국 도서관에서 숨어 있는 악보를 발굴한 적도 있다”는 유 예술감독의 험난했던 작업 과정에 대한 설명이 떠오른다.

‘춘향’의 또 다른 명장면은 친히 임금이 굽어보는 과거 시험장에서 여러 선비가 답안을 붓으로 적어 나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윽고 몽룡은 큰 붓으로 일필휘지하고, 다른 급제자들과 함께 어사화를 꽂고 군무를 춘다. 지나치게 큰 붓이지만 몽룡은 도포 바람으로 자연스럽게 휘두른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기백은 서양에서 온 ‘발레’라는 무용이 이 땅에서 어떻게 새로운 뿌리를 내렸는지 보여 준다. 교향곡 3번 ‘폴란드’ 1악장과 함께 급제자들이 추는 군무는 케네스 맥밀런이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명군무 ‘기사들의 춤’에 비견할 만하다.

한복은 ‘춘향’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작품 속 의상만 170여벌이다. 극 중 몽룡은 7번, 춘향은 6번이나 옷을 갈아입는다. 초연 때부터 한복 디자이너 이정우가 ‘춘향’을 통해 선보인 한복의 아름다움은 아찔한 수준이다. 무용복으로서 한복의 선과 볼륨, 색상은 도전할 여지가 많아 성패가 엇갈릴 수 있는데 ‘춘향’에서 이정우는 그 상한선을 보여 준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