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의 시대가 도래한 가운데 사상 초유의 한국은행 총재 공백 사태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달 말 임기가 끝나는 이주열 총재의 후임 인선이 정권교체기를 맞아 석연찮은 이유로 늦춰지고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합의해 서두르면 공백 사태를 막을 수도 있지만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을 감안하면 일정 기간 공백 사태는 불가피하다는 관측이다.
20일 한은에 따르면 이 총재는 오는 31일 임기(4년)가 종료된다. 따라서 남은 11일 안에 총재 내정과 청문회가 진행되지 않으면 한은 총재 자리는 공석이 된다. 그 경우 한은은 이승헌 현 부총재 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과거 사례에 비춰 봤을 때 후임 인선이 이달 완료될 가능성은 낮다. 2012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한은 총재가 인사청문회 대상이 된 후 두 번의 총재 청문회가 열렸는데 청문회 통과까지 각각 16일, 19일이 소요됐다.
한은 총재 지명이 늦어지는 것을 두고 억측이 난무한다. 지난 16일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원인 중 하나가 한은 총재 인사권에 대한 입장차로 전해졌지만 양측 모두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이후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담당 국장을 차기 총재로 양측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이 역시도 양측이 부인하고 있다. 결국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회동 이후 윤곽이 잡힐 공산이 크다.
이를 통해 후임 한은 총재를 당선인 측이 정하는 것으로 정리되면 다음 달 내각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한은 총재 인선도 미뤄질 수 있다. 만약 다음 달 14일까지 한은 총재 자리가 공석으로 남는다면 한은 총재가 의장으로 참여하는 금융통화위원회에도 공석이 생긴다. 금통위는 기준금리 등 한은의 통화신용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기구다.
한은 정관과 한은법에 따르면 총재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부총재가 총재 직무를 대행하지만, 금통위원과 금통위 의장의 직무를 대행하지 못하게 명시했다. 금통위 의장 직무는 금통위가 미리 정한 위원이 대행하게 돼 있다. 현재 서영경 위원(2021년 10월∼2022년 3월)이 맡고 있고 다음 차례는 주상영 위원이다. 금통위는 오는 24일 회의에서 다음 달 1일부터 9월30일까지 의장 직무를 대행할 위원을 결정한다. 따라서 다음 달 14일 금통위 통화정책방향 회의가 열릴 때까지 신임 총재가 취임하지 못하면, 기준금리 결정 등의 안건을 주 의장 직무대행 주재로 6명의 금통위원이 논의하게 된다.
주요국이 속속 긴축 시대의 막을 올리는 순간 우리는 통화정책 수장의 부재라는 안타까운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미국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코로나19발 경기침체에 대응한 2년간의 ‘제로(0) 기준금리’ 정책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통화긴축정책으로 확연히 돌아섰다. 연준은 점도표(dot plot)를 통해 기준금리가 올해 말에는 1.9%, 내년 말에는 2.8%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연준이 2년간 10∼11회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뜻이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연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