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 2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꿀벌 실종’ 사건이 벌어졌다. 겨우내 잠을 잔 벌을 깨우려 벌통을 열었더니 흔적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는 신고가 잇따랐다. 한국양봉협회가 최근 월동 봉군(벌무리) 소멸피해 전국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회원 2만3697농가 중 17.61%인 4173농가에 피해가 발생했다. 전체 사육 봉군 227만6593군 중 17.15%인 39만517군에서 벌이 사라졌다. 봉군 1개당 약 2만마리 꿀벌이 사는 것을 감안하면 78억마리가 넘는 벌이 월동기간 사라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악화 거듭하며 최악으로… 예견됐던 ‘꿀벌 실종’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올 초 꿀벌 실종 사건의 시작은 지난해 봄이었다.
꽃이 핀 봄철 기상이변으로 비가 많이 오면서 꿀벌 활동에 제약이 생겼고 꿀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다.
꿀은 벌의 먹이이자 가장 좋은 영양제기 때문에 꿀이 생산되는 시기에는 벌에도 질병이나 해충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해 꿀 생산이 부진하다 보니 벌들의 체력이 약화해 꿀벌응애(진드기)에 저항하기 어려워졌다. 농가들은 보통 8월에 응애를 방제하는데, 지난해엔 벌이 약화한 상황이라 피해가 더 일찍부터 발생했고 방제 효과도 떨어진 것으로 농업당국은 분석했다. 일부 농가들은 방제를 늦추고 늦여름까지 로열젤리, 다화꿀(잡화꿀) 등을 생산해 응애 피해가 더 컸다.
여기에 말벌까지 가세했다. 꿀벌의 천적인 데다 방제가 어려운 등검은말벌이 10월 늦게까지 피해를 줬다.
월동 벌군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9∼10월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또다시 월동할 일벌들의 발육 저하로 이어졌다.
설상가상 11∼12월에는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지방에서 9∼10월보다 높은 기온이 12월 중순까지 지속되면서 벚꽃, 홍매화 등 봄꽃이 피었다.
꽃이 피니 월동해야 할 벌들이 꿀을 따러 나갔다. 노화한 벌들이 일을 나갔다가 체력이 바닥나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일벌의 보호를 받지 못한 여왕벌도 죽었다. 농업당국 조사 과정에서 많은 농가가 “월동기간 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최용수 국립농업과학원 연구관은 “벌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아니라 한 달 동안 꾸준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농가들은 월동기간 벌통을 보지 않기 때문에 벌을 깨우러 갔을 때 텅 빈 벌통을 발견하게 된 것”이라며 “응애와 말벌 피해는 매년 있지만 이후 산란을 통해 회복해 왔는데, 지난해 꿀 생산 부진으로 봉군이 약화하면서 악순환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벌값 2배 껑충… 꿀 생산량 10년 전의 20% 수준
한국 벌꿀 생산은 아까시나무 꽃이 피는 5월 시작돼 밤꿀, 다화꿀 생산이 가능한 6월까지 두 달이면 거의 마무리된다. 3월은 봉군을 준비하는 시기로 한 해 벌꿀농사의 성패가 달린 가장 중요한 때다. 그런데 전국 봉군의 17%가 소멸하다 보니 최근 가격이 2배 넘게 뛰었다.
양봉업계 관계자는 “봉군 1개당 10만∼15만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25만∼30만원이다”라며 “피해 농가들은 재입식이 시급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가격에 봉군을 사거나 올해 농사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2020년부터 이어진 꿀 흉작과 봉군 소멸 피해의 근본 원인은 이상기후다. 양봉농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양봉업계 위기가 최근 몇 년이 아닌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최근 10년 벌꿀 생산량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집계한 연간 벌꿀 생산량은 2011년 2만1100t에서 이듬해 2만6900t으로 늘어났다가 이후 꾸준히 줄어 2018년 9700t에 그쳤다. 2019년에는 아까시나무 꽃 개화시기인 5월 초 기온이 섭씨 25도를 넘는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꿀 채집에 좋은 환경이 조성돼 꿀 생산량이 2만3000t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2020년엔 5200t으로 폭락하고 말았다. 봄철 저온현상으로 꽃눈이 얼어 꽃이 제대로 피지 않은 탓이다. 지난해 생산량은 집계되지 않았지만, 한국양봉협회는 전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꿀 생산 부진이 지속될 경우 경영난에 처한 양봉농가들이 줄줄이 농사를 접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양봉업계는 기후변화에 따른 종합대책을 하루빨리 수립해 양봉업계를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0년 넘게 토종벌꿀을 생산해 온 지리산한봉농업조합의 김일권씨는 “봄이면 꽃이 피고 월동을 마친 꿀벌이 제때 벌꿀 채집활동을 하는 자연의 순리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 10년쯤 됐다”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양봉농가들이 꿀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 안정적인 꿀 생산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019년 8월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지만 세부사항은 여전히 마련 중이다. 양봉산업 육성법에는 △양봉업의 구조 개선 및 사양관리 기술 향상 △벌꿀 품질 향상과 유통구조 개선 △소비 홍보 등 벌꿀제품의 수요 확대 △양봉산업 관련 실태조사 △전문인력 양성 등 내용이 포함될 계획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꿀벌피해 확산 방지를 위해 경영안정자금 등을 농가에 신속히 지원할 방침이며 양봉산업 육성을 위한 세부사항을 연내 조속히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인 먹는 시설채소 70%가 벌 매개… “꿀벌 줄면 올 참외재배부터 농사 타격”
2013년, 전 세계 아몬드값이 급등하고 이를 가공하는 시리얼, 우유 등 가격이 연쇄적으로 들썩였다. 원인은 꿀벌 폐사에 있었다. 아몬드 열매는 100% 꿀벌 수분을 통해 열리는데, 전 세계 아몬드의 80%를 생산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꿀벌 집단 폐사가 잇따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로 알려진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가 멸망한다’는 경고가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님을 증명한 사례였다.
벌은 꿀 채집 활동을 하면서 화분(꽃가루)를 매개해 농사를 돕는다. 전문가들은 인류가 먹는 식사 세 입 중 한 입은 벌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화분매개곤충을 이용한 국내 작목 수는 2011년 19개에서 2020년 27개로 늘었다. 이에 사용된 꿀벌, 뒤영벌, 뿔가위벌 등 봉군 수는 같은 기간 34만8000군에서 61만5000군으로 증가했다. 특히 시설채소에서 화분매개 곤충을 이용하는 비율이 48.4%에서 67.2%로 뛰었다.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국내산 시설채소의 약 70%를 벌이 농사짓는 셈이다.
벌이 없어도 농사는 가능하다. 붓 등을 이용해 인공수분을 하면 된다. 일본에서는 수분 목적의 로봇벌이 개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농가들은 “인공수분은 곤충 수분과 비교해 열매 수량과 모양 맛 등 모든 게 떨어진다”고 말한다. 수출용 딸기 농사에 꿀벌을 이용하는 박형규(충남 논산)씨는 “꿀벌을 사용하니 기형과율이 줄고 생산량이 늘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설문 결과 화분매개곤충을 이용하는 농가의 98.9%가 ‘만족스럽다’고 답했으며 생산성 향상(27.5%), 품질 향상(27.0%), 노동력 절감(26.7%) 등을 그 이유로 꼽았다.
화분매개곤충에 대한 농업 의존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벌이 집단 폐사하고 사라지는 현상이 지속되면 농작물 생산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박순배 한국양봉협회 경북지회장은 “여름 과일을 생산하려면 당장 화분을 매개할 벌들이 필요한데 최근 벌 실종에 경북지역 산불 피해까지 겹쳐 하우스에 공급할 봉군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관련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올여름 참외 농사는 물론이고 국내 농업이 1∼2년 안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