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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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예술가’ 권진규 천재 아닌 우직한 바보였다

‘조각 거장’ 탄생 100주년 기념전·평전 출간

서울시립미술관 ‘노실의 천사’전
1950∼1970년대 조각 137점 등 선보여
이건희 컬렉션·방탄 소장품도 나와 눈길
동선동 아틀리에 개방… 부대행사 풍성

조카가 펴낸 ‘권진규’ 평전
“대세 이던 추상 대신 구상조각에 천착
리얼리즘이 아니라 이상주의 혼 추구”
‘지원의 얼굴’(1967).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건칠을 되풀이하면서 오늘도 봄을 기다린다.’

1972년 3월3일, 한국 근대 조각가 권진규가 쓴 시의 일부다. 1년 후, 그는 51세 생을 마감하고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권진규는 끝내 자신의 인생에서 화려하게 꽃피는 봄을 누리지 못한 채, 고독한 길을 가다 좌절 속에 세상을 떠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사후에야 그를 ‘근대 조각의 선구자’, ‘리얼리즘 거장’, ‘한국과 일본 조각사에 획을 그은 역사적 인물’로 평가했다. 추앙하려는 동기였다 할지라도, 호기심과 흥밋거리로 소모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천재 조각가’라는 수식어와 함께였다.

이제는 다르다. 권진규는 ‘비운의 주인공’도, ‘천재’도 아니라며 재규정을 제안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허경회의 책 ‘권진규’와 서울시립미술관 전시다. 허경회는 권진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4년간 한집에서 살며 외삼촌 권진규 품에 있었던 조카로, 권진규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온 인사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전이 막을 올렸다. 올해 주요 기대전시 중 하나로 꼽혀 왔다. 권진규의 1950∼1970년대 조각 137점과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73점을 선보인다. 역대 권진규 회고전 중 최대 규모다.

‘자소상’(1969∼1970).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지난해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이 141점에 달하는 작품을 대량 기증하면서 이번 전시가 추진됐다. 기증품 가운데 약 50점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가운데 5점, 방탄소년단(BTS) 알엠(RM) 개인소장품 1점도 전시에 나왔다.

전시는 그의 작품 인생을 입산-수행-피안의 세 단계로 나눠 시대별로 보여 주고, 짧은 창작활동에도 밀도 높은 삶으로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돌아본다. 전시장은 서울에 정착해 직접 우물을 파고 가마를 설치하며 2년에 걸쳐 만든 아틀리에를 모티프로,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좌대와 우물 형태의 좌대 등으로 꾸며졌다. 전시는 권진규에 대해 연구해야 할 분야로 부조 작품을 꼽는다.

전시가 권진규가 활동했던 시절로 돌아가 오감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허경회의 책은 한층 깊이 있게 그를 사유한다.

 

허경회는 로댕(1840∼1917)의 제자 에밀 부르델(1861~1929),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1897~1981), 시미즈의 제자 권진규(1922∼1973)로 이어지는 ‘예맥’(藝脈) 위에서 권진규를 바라본다. 그를 둘러싼 비운의 서사보다 작가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살핀다.

‘입산’(1964∼1965).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가령 권진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징용됐다 탈출했고, 일본 미술학교 졸업 후 전후 일본의 안정 속에 그의 작품이 인정을 받을 때쯤, 어머니를 보살피러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사정이 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허경회는 권진규의 귀국이 ‘시미즈의 실력파 제자’가 아니라 ‘권진규라는 새로운 세계’로 탈바꿈하려 했던 작가의 의지였다고 본다. 또 대중의 이해를 받지 못한 천재, 또는 추상 조각이 대세를 이룬 미술판의 정치싸움에서 배제된 천재보다는, 우직하게 구상 조각에 천착한 ‘바보’였다고 말한다. 그의 조각에는 리얼리즘이 아니라, 이상주의의 혼을 담으려는 의지가 가득하다고 설명한다. 그 의지의 대표작을 조각 작품 ‘손’으로 꼽는 허경회는, 개인 소장으로 흘러들어 간 ‘손’의 행방을 애태우며 걱정했으나 그 주인공이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었고, 지난해 무사히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으로 기증됐음을 확인하며 뛸 듯이 기뻐했던 소회를 털어놓았다.

‘보살입상’(1955).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미술계에 특별한 이벤트기도 하다. 유족이 우여곡절을 이겨 내고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안착시켰음을 보여 주며 함께 안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유족은 일본에 흩어져 있던 작품을 모았고 미술관도 지으려 애써 왔다. 2004년 하이트가 유족의 작품을 인수해 미술관을 지으려다 불발됐다. 수년 전엔 미술관을 짓겠다는 한 기업에 작품을 넘겼다가, 미술관은커녕 대부업체에 담보물로 넘어간 사실을 확인하고 가까스로 되찾았다. 허경회는 책에서 “드디어 숙제를 마쳤다”며 “이제 유족은 모든 시민”이라 말한다.

조카 허경회가 지은 책 ‘권진규’

◆동선동 아틀리에 특별 개방

이번 전시는 부대행사가 유독 풍성하다. 다음 달 9일에는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26일부터 5월28일까지 약 두 달간 매주 토요일에 서울 성북구 동소문로(동선동)에 위치한 권진규 아틀리에를 특별 개방한다. 이곳에서 사진전이 개최되고, 개방 첫날인 3월26일과 5월4일에는 특별강연이, 4월7일과 5월4일에는 음악회가 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권진규 아틀리에까지 토요일마다 셔틀버스도 운영한다.

전시기간 중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허경회 권진규기념사업회 대표와 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가 ‘특별 도슨트-나의 외삼촌, 권진규’를 진행한다.

다음 달 7일에는 전시가 열리는 서소문본관의 1층 로비에서 음악회 ‘콰르텟 S 특별 연주회-권진규가 사랑한 클래식’이 열린다. 서울 전시 후 7∼10월 광주광역시에서 순회전이 열린다.

5월22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