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룰렛/데즈먼드 슘/홍석윤 옮김/알파미디어/1만6800원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서 홍콩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공부한 데즈먼드 슘은 중국 경제부흥기에 수조원대의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개인 제트기를 타고 유럽여행을 다니며 호화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가 아들과 함께 영국에 있던 2017년 9월, 전 아내이자 사업 파트너였던 50세의 휘트니 단이 동료 3명과 함께 25억달러짜리 개발 프로젝트인 ‘제네시스 베이징’ 사무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수십억달러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손 안에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존재였던 휘트니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실종된 것이다.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떻게 대명천지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중국 사회의 진실은 무엇이고, 도대체 휘트니 단은 어떤 인물일까.
데즈먼드 슘은 전 아내의 실종을 계기로 룰렛 도박판 같은 중국 사회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공산당과 혁명 1세대의 후손들인 ‘홍색 귀족’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한 책 ‘레드 룰렛’(알파미디어)을 펴냈다. 책은 조국을 위해 사업을 벌이고 홍콩 우산혁명 때 반대시위를 조직하기도 한 저자가 공산당 독재와 부패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선 과정을 용기 있게 기록했다. 내부 고발자의 심정으로.
책에 따르면, 저자 데즈먼드는 1968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1978년 부모를 따라서 홍콩으로 이주했다. 낯선 홍콩에서 가난의 고통을 경험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재무와 회계를 공부했다. 1993년 홍콩으로 돌아와 증권 브로커로 잠시 일한 뒤 사모펀드회사 차이나베스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차이나베스트의 지부장으로 베이징으로 돌아간 그는 2002년 통신업계에 하드웨어를 판매해온 회사 ‘그레이트오션’의 자금 조달에 관여하면서 야망이 넘치는 휘트니 단을 운명처럼 만난다.
산둥성 출신으로 대학 시절 합창단 리드 싱어였던 아내이자 사업 파트너 휘트니는 대학 총장 비서와 부동산 개발회사 CEO 비서직을 경험한 덕분에 ‘관시(關係)’에 탁월했다. 관시는 중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휘트니는 그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파고들었다.
“휘트니는 중국에서 성공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열쇠는 정치적 수완이었다. 중국에서 기업가들은 공산당의 이익에 영합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구멍가게의 주인이든, 중국 실리콘밸리의 기술 천재든, 사업을 하려면 예외 없이 이 시스템 안의 스폰서가 필요했다. 두 번째 열쇠는 기회가 왔을 때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두 가지 열쇠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만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휘트니가 시작하고 내가 함께 가담한 이야기의 핵심이다.”(106쪽)
데즈먼드는 휘트니의 안내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홍색 귀족들의 세계로 들어갔다. 2002년 늦여름 저녁 베이징 그랜드 하이엇호텔 지하에 있는 광둥식 레스토랑에서 데즈먼드와 휘트니가 ‘장 이모’라고 부른 원자바오 당시 부총리 부인과 만나는 장면은 자못 인상적이다.
“약속 시간인 6시 30분이 되기 전에, 우리는 원형 대리석 계단을 통해 로비로 올라가 손님을 기다렸다. 옷차림도 신경 썼다. 휘트니는 샤넬을 입었고, 나는 깔끔한 정장을 입었다. 이윽고 검은색 BMW가 미끄러지듯 들어왔고, 파란색 막스마라 의상에 꽃무늬 스카프를 한 다소 평범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 장 이모가 반가운 미소를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곧 마음이 놓였다. 휘트니는 장 이모의 팔꿈치를 잡고 호위하듯 아래층의 예약한 방으로 안내했다. 장 이모는 냅킨을 와인 잔에 공작 꼬리처럼 잘 정돈해 놓은 상석으로 곧장 걸어가 앉았다.”(111쪽)
휘트니가 장 이모와 어떻게 관시를 형성하고 만들어 갔는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휘트니는 장 이모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을 미리 파악해서 채워주려 했고, 위기 때마다 옆에서 도왔다. “마치 악어의 이빨을 청소하는 물고기처럼.” 휘트니는 이를 통해 장 이모의 가장 든든한 사람이 됐고, 권력을 장악한 당 관료와 홍색귀족들에게 접근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심지어 중국 최고의 네트워크인 칭화대 동문 네트워크를 활용하기 위해 칭화대 박사과정에 뒤늦게 들어가기도 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 물류거점을 개발했고, 베이징 중심부에 최고급 불가리호텔과 비즈니스센터 빌딩을 세울 수 있었다. 수백만달러를 장학금으로 쾌척했으며, 값비싼 집과 미술품을 구입해 호화롭게 생활했다. 데즈먼드는 13년간 휘트니와 함께 사업을 하면서 권력과 부의 정점에 올랐다.
책에는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뿐만 아니라 권력투쟁에서 사라져간 왕치산,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는 물론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까지 등장한다. 휘트니는 2008년 장 이모의 주선으로 아직 부주석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시진핑 부부와 식사를 한다.
“휘트니는 시진핑과 식사하는 내내 시진핑이 아내 펑리위안이 말하도록 놔두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그는 그저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따금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 시진핑은 이미 지존의 길에 들어섰고, 그와 그의 아내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했다.”(262쪽)
몇 년 뒤인 2012년 11월, 시진핑이 라이벌 보시라이를 밀어내고 당서기에 오르면서 대대적인 부패척결 드라이브를 걸면서 휘트니 부부는 위기를 맞게 된다. 데즈먼드는 2015년 휘트니와 이혼을 했고 다시 중국을 떠났다. 책은 관시로 맺어진 중국공산당과 홍색귀족들의 부조리와 권력 암투를 소설보다 더 소설적으로 펼쳐보이는 데 성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