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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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사관생도 신분으로 참전한 김현곤 장군 별세

2년 과정이 전쟁 때문에 1년으로 단축
동기생 다수 전사… 비운의 ‘육사 10기’
6·25전쟁 참전용사인 고(故) 김현곤 예비역 육군 준장. 연합뉴스

6·25전쟁 발발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 신분으로 전투에 투입된 참전용사 김현곤 전 방공포병학교장(예비역 육군 준장)이 3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충남 예산군 광시면 가덕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신생 대한민국의 안보를 책임질 각오로 1949년 7월 육사에 입교했다. 그때까지 육사는 광복군, 중국군, 일제 학병 등 군대 복무 경험자들 중에서 신입생을 뽑아 단기 연수를 거쳐 1기부터 9기까지 장교를 배출했다. 고인은 “앞으로는 2년간 제대로 된 생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는 얘기를 듣고 육사를 선택했는데, 고인을 포함한 신입생 300여명은 입교 당시만 해도 ‘생도 1기’로 불렸다.

 

1년 남짓 군사교육을 받았을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국군은 아직 훈련이 덜 끝난 사관생도까지 최전방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아무리 전황이 다급해도 그렇지 사관생도를 전쟁터로 보낸 것은 세계 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인이 속한 생도 1기생 300여명은 경기 남양주 퇴계원 일대에서 처음 북한군과 격전을 치렀고 이어 한강 방어작전에 투입됐으며 적군의 한강 도하 이후에는 수원 지역에서도 전투에 참가했다. 정부가 대전으로 후퇴한 뒤인 1950년 7월 고인 등 생도 1기생들은 예정보다 1년을 앞당겨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육사 10기’라는 기수를 부여받는다. 이미 많은 동기생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130여명만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나마 물자가 부족해 흰 반창고를 찢어 철모에 붙인 이른바 ‘반창고 계급장’이었다.

 

전란 와중에 동기생 졸업 앨범도 미처 만들지 못해 필름 원판을 땅속에 묻어뒀다가 전후인 1957년에야 비로소 앨범을 제작했다는 일화는 육사 10기의 비애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널리 회자된다.

육군사관학교 교내에 있는 불멸탑. 육사 10기 동기생들이 6·25전쟁 당시 생도 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동기생을 추모하고자 1959년 건립했다. 육사 홈페이지

고인은 전후에도 군에서 계속 복무해 준장까지 진급하고 별을 달았다. 고인이 육군에서 맡은 마지막 보직이 방공포병학교장인데 당시만 해도 육군 소속이던 방공포병학교는 훗날 노태우정부 때 육군 방공포 부대가 공군으로 이관되면서 지금은 공군 방공포병학교가 됐다.

 

전역 후 잠시 농어촌개발공사 이사를 지낸 고인은 1980년 한국냉장 사장이 되며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군인 시절부터 “원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던 고인은 ‘정직’을 경영의 최고 가치로 삼았다. 기업인 시절의 그를 접한 지인들은 “김 사장은 거짓말, 무책임, 부조리를 가장 싫어한다”며 “군인 출신답게 회사 운영에서도 자금력이나 판매 기법보다 정신력을 더 중시한다”는 인물평을 남겼다. 고인 스스로 생전에 기업 경영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합리적이고 정직하게 운영하면 이윤은 그림자처럼 따른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역 군인 시절부터 등산, 테니스, 골프 등 운동을 즐겼다고 한다. 3년여 전인 2018년 11월 부인을 먼저 떠나보냈다. 유족으로 자녀 김진욱(전 부경통신 대표이사)·상우(YTN 경제부 선임기자)·미희·혜란씨, 사위 황명천(전 롯데케미칼 이사)·성희경씨(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이 있다. 빈소는 국립중앙의료원, 발인 7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02)2262-4800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