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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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어셔에서 촉망받는 연출가로…‘눈을 뜻하는 수백가지 단어들’ 김세은 연출 인터뷰

오랜 통역가, 번역작가, 조연출 시절을 끝내고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로 첫 연출작을 선보인 김세은 연출. 엠피앤컴퍼니 제공

‘연극·뮤지컬의 천사’가 있다면 지금 그의 날개 밑은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는 김세은 연출 차지다. 2008년 대학 영문학도 시절 뮤지컬 극장 아르바이트에서 시작한 무대 인생이 초대형 해외 뮤지컬 내한공연 제작진 통역, 그리고 여러 인기 뮤지컬·연극 번역, 조연출로 이어진 끝에 드디어 자신의 첫 연출작을 국내 무대에 올리게 됐다.

 

“그냥 고등학생 때부터 공연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래서 대학생이 되면서 바로 아르바이트(인터파크 현장운영팀·하우스 어셔)를 시작해 공연장에서 일도 하고 프로덕션을 엿볼 기회는 계속 있었습니다. 그래도 전공자가 아니어서 ‘이게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따로 한 적이 없었죠.”

“그저 극장에 매일 가고 싶었다”는 김세은이 지난 10여년 걸어 온 길은 공연 팬이라면 탄성을 지를 만하다. ‘위키드’, ‘라이온 킹’, ‘지킬앤하이드’, ‘스위니 토드’, ‘썸씽로튼’, ‘하데스 타운’ 등 하나같이 인기 있는 대형 뮤지컬의 통역, 그리고 많은 관객 호응을 얻었던 연극 ‘오만과 편견’의 번역 및 조연출, 개성 뚜렷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미드나잇 액터 뮤지션’, ‘뉴시즈’ 등의 조연출을 맡았다. 그만큼 “대체 누구길래”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경력의 주인공이다. 그 시작은 충무아트홀, 블루스퀘어 등 뮤지컬을 주로 올리는 공연장에서 어셔로 일한 지 5년째였던 2012년 찾아온 기회였다. 전공 때문인지 어느덧 ‘영어 잘하는 어셔’로 통하게 된 김세은은 “뮤지컬 제작부에서 통역을 구하니 지망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넉넉히 시험과 면접을 통과한 그가 “우리랑 일하자”는 제안을 받은 작품이 바로 ‘위키드’, 2000년대 이후 새로 나온 뮤지컬 중 가장 크게 흥행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뮤지컬 첫 라이센스 공연이었다. 뮤지컬 일번지인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날아온 연출과 국내 제작진 소통을 도맡은 김세은은 ‘위키드’ 한국어 첫 공연에서 맹활약한다. 통역이 필요했던 외국인 연출과 낯선 무대에 서야 했던 우리나라 배우들 사이에서 훨훨 날았다. 이미 지난해 ‘위키드’ 오리지널팀 내한 공연 때 어셔로 거의 매일 공연을 보면서 작품을 샅샅이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덕션 할 때는 우리나라 배우들과 소통하는데 그때 이미 가사는 다 외운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작업할 때도 대본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바로바로 통역할 수 있었으니 매우 큰 도움이 됐어요.”

 

오랜 경험을 쌓은 베테랑 연출의 손과 발로 일하는 것은 많은 걸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다 같이 만들어 갔어야 하니까 정말 배우들 손끝 하나, 소품 어디에다 놓는지까지도 연출이 배우에게 가르쳐야 하는 연습이었죠.”

 

그렇게 극장 안내원에서 단숨에 무대 안 깊숙이 들어온 김세은에겐 통역은 물론, 뮤지컬·연극 대본 등 비슷한 일감이 밀려들었다. ‘덕업일치’에서 생겨난 열정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결과였다. “영문학과지만 유학이나 교환학생 경험도 없이 그냥 열심히 한 경우였는데 어쨌든 일을 하면서 영어가 계속 단련됐죠. 정말 준비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공연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느 대학 졸업생처럼 기업 입사 원서도 내곤 했지만 어느덧 진로는 무대로 정해졌다. “연출 파트에서 주로 일하긴 했는데 사실 나중에는 이것저것 다 했어요. 연출·안무·음악 감독 통역도 했지만 무대조명·음향·의상·메이크업·가발팀 통역까지도 했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프로덕션 전반에 걸쳐서 많이 배웠고 그런 경험이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거의 일 년 넘게 매일 대본을 소리 내서 읽고, 계속 고치고 고쳤다”는 김세은 연출은 연출과 통역, 번역 중 번역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하면 할수록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한계와 언어장벽 때문에 스스로가 작게 느껴져요.”

어느덧 2016년부터 무대에서 조연출로 일하게 된 김세은이 연출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아야겠다는 결심이 서자 택한 것은 영국 유학이었다. 2017년 에식스대학교 드라마 스쿨 이스트15에 진학해 학업과 무대 활동을 병행한다.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왕과 나’의 연출부로 일한 데 이어 한글 창제 과정을 다룬 뮤지컬 ‘1446’ 런던 워크숍의 조연출을 맡았고 런던 프린지 시어터의 연극 ‘아이 웨이트’(I Wait), ‘파이 인 더 스카이’(Pie in the Sky)가 연출작이다. 무작정 하루에도 열몇 개씩 극장·극단 앞으로 이력서를 보낸 결과였다. “‘학생이고 돈 안 줘도 좋다. 경험을 쌓고 싶다’ 하면 받아 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어쨌든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갔으니 한 시도 낭비하면 안 된다 싶어서 굉장히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그때야 연극을 처음으로 공부하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다는 게 굉장히 재밌었죠.”

김세은 연출의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공연 장면. 아빠를 잃은 10대 소녀 로리의 성장기다. 엠피앤컴퍼니 제공

영국 극장가가 방역 때문에 기약 없이 문 닫으면서 김세은은 2020년 다시 귀국한다. 아니라면 아마 한창 재미 붙인 영국 무대에서 계속 활동했을 터였다. 인연이 닿은 건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일인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서울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5월1일까지)이었다. 2018년 영국 유학 시절 일인극 경연대회에서 우연히 만나 국내 제작사에 좋은 대본으로 추천해 보낸 작품이 국내 첫 연출작으로 돌아왔다. 죽은 아빠 꿈을 이루기 위해 북극으로 탐험을 떠나는 노르웨이 10대 소녀 로리가 길 위에서 만난 인연 덕분에 부쩍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지만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작품으로 입소문 퍼지면서 연일 만석을 기록 중이다. 김세은은 자신의 첫 작품에서 연극 무대의 가능성을 120% 보여 준다. 일인극 특유의 재미와 강점을 발휘하는 연출로 오랫동안 쌓은 실력을 입증했다. 대본 자체에는 충실하되, 이외의 것은 거의 모두 연출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무려 2년을 매만져 무대에 올린 작품답게 매끄럽고 섬세하며, 젊은 연출 첫 작품에 대한 애정은 제작진 모두의 것이다. “작품을 처음 공연한 날, 사실 저는 좀 담담했어요. 그런데 저만 안 울고 배우도, 스태프분들도 다들 울었어요. 무대·조명·음향 분들은 제가 통역을 시작했을 때부터 굉장히 오랫동안 봤던 선생님들인데, 그래서 이제 제 첫 작품이니 더 열심히 해 주시겠다고 저보다 더 욕심내서 도와주셨다 보니 울어 주신 것 같더라고요.”

 

북극에서 펼쳐지는 성장기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은 누구나 경험하는 만큼 공감대 큰 작품이다.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배우들이랑 ‘만약 로리가 이렇게 떠나지 않았더라면 엄마랑 얼마 동안 얘기를 못 했을까, 얼마나 이렇게 서먹하게 아빠의 상실에 대한 얘기를 덮어 두고 지냈을까’라는 얘기를 했죠. 그래서 옳은 방법으로 보내 줘야 하고 그래야 보는 관객에게도 진심이 전달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국내외에서 여러 무대와 연출가들을 접한 신참 연출가에게 ‘좋은 연출은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다. “사실 그런 게 없는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 같아요. 어떤 무대, 어떤 배우, 어떤 대본을 만나도 거기에 맞춰서 작업할 수 있는 연출이 좋은 연출인 것 같아요. 나쁜 연출이요? 한 가지 길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내 방법만이 옳은 게 아니구나’, 그리고 ‘지금 옳은 게 내일은 옳지 않을 수도 있구나’를 매일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