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알수록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큐레이터 출신인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백남준과 인연이 각별하다. 공부를 마치고 학예사로 처음으로 일한 곳이 백남준아트센터고, 리움미술관을 거쳐 다시 첫 기관장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하고 있어서다. 백남준 연구와 전시의 진지 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그의 탄생 90주년 기념 행사들을 이끌고 있는 김 관장을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미술관에서 만났다.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유명한 백남준의 예술사적 업적보다, 그가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 그의 면모를 설명할 때 더욱 신나 보였다.
김 관장은 “백남준은 협업자들의 기여를 아낌없이 표시했고 ‘저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못 했을 거야’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밝히고 기록했다. 미술관에 백남준 작업실을 구현한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에서 자신에 대한 메모를 보고 우는 분들도 있다”고 소개했다.
백남준이 관객참여형 작품을 중시하고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한 것도 그의 성정과 무관치 않다고 추측된다. 동시에 백남준은 예술의 사회적 역할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신념의 인물이기도 했다.
김 관장은 “백남준은 사회적 발언과 파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리낌이 없었다. 예술가 역할은 미래를 사용하는 것에 있다는 말을 한다. ‘세계의 평화’, ‘지구 보존’ 이런 공익적 가치가 사회의 제1의 가치가 돼야 한다는 말도 거리낌없이 했다. 사회와 예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던 작가였다. 가령 2차 대전이 남긴 상흔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이 작품 속에 담겨있고, 문화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를 예술을 통해 바꿔놓고 싶어 했다”고 설명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은 시대의 전위였고 당시 초호화 전자 예술이었지만, 브라운관 TV를 본 적도 없는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지금 백남준 작품의 미적 감동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물었다.
김 관장은 이렇게 답했다. “감각적인 훈련이라든가 그런 게 지금은 전혀 다른 매체에 지금 맞춰져 있는 사람들이니 낯설 수 있다. 지금 관람객은 당시 시대상을 같이 놓고 보길 권한다. 백남준이라는 작가가 당시 새로운 매체를 이용해 도전하고 실험했던 배경을 봐야 한다. 특히 1960년대에 주목을 해주면 좋겠다. 1960년대라는 것이 전후 시대로서 미술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있어서 가장 과감한 실험과 여러 가지 시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때다. 인류가 가장 예술적인 시대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이어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모두가 느끼던 시기에, 백남준이 유럽에서, 미국에서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그 매체가 사회에 미칠 영향을 보여주고 통찰했다는 것은 아주 놀랍다”고 했다.
김 관장은 “그 매체를 이용함으로써 사회의 선한 영향력을 생각했던 사람임을 상기하며 작품을 보면 좋다”고 덧붙였다. 또 “미술사를 벗어나서는, 백남준 작가가 그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우리에게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준다”며 “백남준이 1960∼70년대에 예언자 같은 얘기를 했는데, ‘앞으로는 우리 모두가 아마추어 텔레비전 방송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지금 유튜브 1인 방송 시대를 내다본 것처럼 들린다. 텔레비전이든 방송이든 위성이든, 매체라는 것이 갖고있는 근본적인 힘에 대한 사유가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연중 벌어지는 백남준 관련 행사 가운데, 김 관장은 하이라이트로 7월에 있을 축제를 꼽았다. 김 관장은 “팬데믹으로 오랫동안 묶여있던 사람들이 백남준 90주년 기념 축제라는 판을 통해서 백남준의 자유로운 영혼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