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대여법(Lend-Lease Act).’ 대다수 독자가 중·고교 역사 수업 시간에서 들어봤을 이 용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년 만에 재등장했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치 독일과 싸우는 소련(현 러시아)이 지원 대상이었던 옛 무기대여법과 달리 이번에는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가 지원 대상이란 점이다.
미국 상원은 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방어를 위한 무기대여법(Ukraine Democracy Defense Lend-Lease Act)’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하원에서도 가결되고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정식으로 서명하면 미국의 정식 법률이 된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를 미국으로부터 무한정 빌려 쓸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부 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미 상원의 우크라이나 무기대여법안 통과에 감사한다”며 “우크라이나가 미국제 무기 등 군사장비를 빨리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첫번째 단계”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어 미 하원과 백악관을 향해 “하원의 신속한 법안 통과, 그리고 대통령의 서명을 고대한다”고 덧붙였다.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인 공화당이 초당적으로 발의한 우크라이나 무기대여법안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미국제 무기를 거의 무제한으로 빌려 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구체적으로 우크라이나 영공을 넘나드는 러시아 전투기 및 미사일 요격을 위한 중·장거리 대공 방어시스템, 러시아 기갑부대의 탱크를 부술 수 있는 대전차 무기, 러시아 지상군을 공중에서 타격할 무인 전투기(드론) 등을 우크라이나가 필요로 하는 만큼 충분히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살상무기를 제공하려면 의회 동의 등 거쳐야 할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한데 하고 이를 건너뛰어 가장 간소한 과정을 거쳐 신속하게 무기를 지급할 수 있다는 점에 이 법률의 의미가 있다.
미 언론에선 2차대전 당시 영국 등 연합국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대여법의 2022년도 버전이란 평가가 나온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고 이듬해인 1940년 6월 프랑스마저 독일에 항복하며 영국 홀로 히틀러와 대적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마련해 뒤에서 영국을 돕는다. 1941년 3월 11일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되었으며 그때부터 1945년 종전 시점까지 영국은 물론 소련, 중국, 자유 프랑스 등 독일과 교전하는 모든 국가가 지원 대상이 되었다.
소련의 경우 1941년 6월까지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평화를 유지하다가 이를 깬 독일의 침공을 받고 비로소 2차대전에 뛰어들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소련은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2700만명 이상이 독일군에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무기대여법에 따른 미국의 군사원조가 없었다면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고 승전국이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80년 가까이 지나 러시아는 이제 미국의 ‘적(敵)’이 되었다. 미 상원을 통과한 무기대여법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러시아군을 파괴하기 위한 치명적 무기를 우크라이나 측에 신속히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 당연히 러시아는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전쟁 당사자가 아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취지에서다. 러시아 국방부는 미국을 겨냥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는 건 사실상 무력충돌에 관여하는 걸로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요청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