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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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력이 벼슬”… 박지현 논란이 드러낸 한국식 능력주의 민낯 [이슈속으로]

온라인 커뮤니티 달군 ‘지방대 학벌’

“한림대 출신이 무슨 정치냐” 비판 댓글
학벌 폄훼하는 신조어 ‘국평오’ 표현도
이준석 대표의 출신 학교와 비교 희화화

n번방 공론화 ‘추적단 불꽃’ 활동 주역
민주 청년 오디션 통과 사실 거론 안돼
공정 담론 시대… ‘시험 만능주의’ 심화

정태석 전북대 교수 인터뷰
제한된 기회 속 평가 자체는 불가피
보편적인 평가 방식 마련은 필수적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오른쪽)와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2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7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있다. 연합뉴스

“저학력이 벼슬인 세상.”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인터뷰와 관련해 최근 서울대 재학생 및 졸업생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댓글이다. 박 위원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제가 춘천 한림대를 나왔는데 이를 두고 주변에서 ‘한림대 나온 애가 무슨 말을 하냐’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며 “능력 평가 기준이 오로지 학벌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장의 말이 무색하게도 해당 게시물에는 “‘스카이’(SKY : 서울대·고려대·연세대)도 못한 걸 한림대가 한다고?”, “난 얘(박 위원장) 나오고서 한림대라는 학교가 존재한다는 걸 처음 앎” 등의 댓글이 이어졌다.

스누라이프 내에 박 위원장 관련 게시물은 지난 1∼2월 사이 3개에 불과했다. 민주당 선거대책관리위원회에 합류했을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셈이다. 지난달 11일 공동비대위원장 발탁 소식이 전해진 후 박 위원장에 대한 주목도는 부쩍 높아졌다. 11일 현재 ‘박지현’으로 검색 가능한 게시물만 100개가 넘는다. 댓글 또한 수백개 수준이다.

대다수는 위와 같이 박 위원장의 학벌을 폄훼하는 적나라한 혐오 발언이다. ‘국평오’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보인다. 국평오는 ‘대한민국 국민 평균은 수능 5등급’의 줄임말로, 상대의 학벌이나 이해력을 비하하는 의도로 쓰이는 신조어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졸업한 하버드대와 비교하며 희화화하는 댓글 역시 발에 채듯 흔하다.

이 같은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박성민 청와대 청년비서관의 임명을 둘러싸고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해 6월 박 비서관의 임명 당시 일각에서는 박 비서관이 강남대를 자퇴하고 고려대에 편입한 이력을 문제 삼았다. 그가 ‘순혈’이 아니란 것이다.

“행정고시에 붙어도 보직은 5급인데, 25세의 대학 재학생에 불과한 박 비서관이 1급 공무원이 되는 것이 공정하냐”라는 비아냥거림도 나왔다. 급기야 자신이 고려대 재학생이라고 주장한 한 네티즌은 ‘박탈감닷컴’이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박 비서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해당 사이트는 현재 폐쇄된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공동비상대책위원장(왼쪽)과 박홍근 원내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공정’이 시대 화두? “실상은 능력주의”

박 위원장과 박 비서관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식 능력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박 위원장이 ‘추적단 불꽃’ 활동을 통해 n번방을 공론화한 주역 중 한 명이란 사실과, 박 비서관이 2019년 민주당의 청년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점은 과소평가한다. 대신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이들의 학벌이다. ‘시험’을 통해 학벌로서 증명되지 않은 능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문재인정부 5년을 거치면서 ‘공정’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수시 입학사정관제, 사법고시 존폐, 의학전문대학원 도입,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을 둘러싼 전공의들의 파업 등 이슈가 생길 때마다 사회적 논쟁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태다. 공개채용시험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 보안검색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일부 20∼30대 취업준비생들은 “청년 세대의 취업 기회를 빼앗는다”고 입을 모았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공정 담론의 밑바닥에는 능력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한다. 능력주의는 1950년대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고안한 개념이다. 세습 신분 중심의 사회에서 능력 중심의 사회로 이행하는 합리적 과정이란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공을 오직 개인 능력의 산물로 여기는 성격도 내포됐다.

한국에서의 능력주의는 후자에 가깝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몇 년간 공정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능력주의의 일종인 ‘시험만능주의(Testocracy)’라는 것이다.

◆대입 결과가 韓 능력지표… 학벌주의 심화

‘교육열, 능력주의 그리고 교육 공정성’ 논문의 저자인 남미자 경기도교육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한국 사회에서 대학입시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을 확인하는 지표로 작용해 왔다”고 지적했다. 대학 서열화에 맞춰진 입시 과정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능력을 수치화할 수 있는 시험이 가장 중요한 평가 방법이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에서 학벌주의와 능력주의는 끈끈하게 결합했다.

남 연구위원은 “국내에서는 오히려 최근 들어 능력주의 담론이 더욱 강화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1960∼70년대 고도성장이 이뤄지던 시기에는 능력주의가 건전하게 작동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저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 기조에 접어들면서, 노동 시장에서는 극소수만 경쟁에서 살아남는다. 능력에 따른 차별에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인식의 변화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주의는 오히려 최근 들어 공고해진 모양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매년 실시하는 교육여론조사에서 한국의 학벌주의가 심화될 것이란 응답은 2017년 전체 17.8%에서 지난해 26.4%로 8.6%포인트 늘어났다. 반대로 약화될 것이란 응답은 같은 기간 15.0%에서 11.4%로 3.6%포인트 감소했다. 대학을 일류, 이류 등으로 분류하는 대학 서열화 또한 심화될 것이란 응답은 20.8%에서 26.7%로 늘어났지만, 약화될 것이란 응답은 12.1%에서 11.3%로 소폭 줄었다.

다만 이 같은 능력주의는 승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을 능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한 존재로 치부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남 연구위원은 “시험의 공정성에 천착하게 되면 비능력적 요소에 의한 결과의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된다”며 “절차의 공정성에 집착할수록 결과의 불평등에 무관심하게 된다”고 밝혔다.

◆“능력주의 개념 한계… 공정성 회복이 우선”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은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이 책은 2021년 연간 판매 순위 6위에 올랐다. 본격적인 인문 서적치고는 이례적으로 주목 받은 셈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공이 결정된다는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은, 국내 많은 독자들이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에 목말랐음을 에둘러 드러낸다.

 

능력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지적은 비단 샌델 교수만 한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사회비평가 박권일의 저서 ‘한국의 능력주의’가 주목을 받았다. 대개 능력주의를 다룬 논의들은 능력주의의 한계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명문대생들이 스스로를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정한 절차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여기지만, 실은 상당수가 중산층 부모가 제공한 풍족한 환경을 토대로 입시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능력’의 형성 과정 자체가 불공정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한다는 비판도 따라붙는다.

 

그러나 여전히 공백은 남아 있다. 능력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정태석(사진) 전북대 교수는 “능력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공정이라는 개념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경향도 나타난다”면서 “하지만 직장이든, 대학이든 사람을 안 뽑을 수는 없지 않으냐”라고 반문했다. 제한된 기회 구조 안에서 선발을 위한 평가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험’은 공정한 능력 평가 방식 중 하나가 된다는 게 정 교수의 말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동일한 능력에 대한 평가가 필요할 경우 공정하고 보편적인 평가 방식의 마련은 필수적”이라면서 “능력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과정의 불평등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평가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지역거점 국립대 통합을 들었다. 거점지역마다 대규모의 우수한 대학을 만듦으로써 대학 서열 체제와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는 한편, 계층과 무관하게 공평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신뢰와 연대감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전제”라고 강조했다. “학생부종합전형 같은 경우 애초 학생의 평가기준을 다양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됐다. 그러나 사회적 신뢰가 낮다보니 실제로는 평가하는 사람도, 평가 대상자도, 기록에 대해 서로 신뢰를 못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