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은 다 착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정신 차려라.’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비난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눈에 띄었던 댓글이에요. 이 사회가 오래도록 장애인들에게 착함을 강요한 것이지, 우리도 다른 이들과 똑같아요. 슬프면 울고, 답답하면 소리 지르고, 화나면 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냥 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쁜 장애인’ 소리 듣더라도, 자유롭게 이동하고 싶고, 교육받고 싶고, 일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난 3월29일 오전, 휠체어를 타고 서울지하철 4호선에 오른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문경희(53)씨의 발언이다. 출근길 군중 속에서 떠듬떠듬 느리게 들려오던 문씨의 말소리는 현장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잔상처럼 남았다. 일주일 뒤 그를 다시 찾아갔다.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이틀에 걸쳐 약 3만보를 걸으며 문씨의 바퀴를 따라갔다.
#1일 차 오전 10시
문씨가 거주하는 세종시 금남면 용포리에서 사무실이 있는 세종시청까지는 3.5㎞ 떨어져 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조회하자 14분짜리 추천경로가 표시됐다. 여기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장애인에게는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함수’가 더 추가된다. 첫째, 계단 대신 경사판이 설치된 저상버스 노선이 있는가. 둘째, 저상버스와 정류장 사이에 적정 높이의 연석이 설치돼 있는가. 세종시에서 운행 중인 시내버스 62개 노선 중 저상버스가 포함된 노선은 7개뿐이다. 나머지 노선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파트 현관을 나선 문씨는 800m 떨어진 정류장까지 휠체어로 이동했다. 약 20분이 걸렸다. 본래 이 정류장에는 저상버스와 연결되는 연석이 없어서 휠체어 탑승 자체가 어려웠다. 이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했으나, 사소한 문제로 치부됐다. 현재는 휠체어를 타는 시민들을 위해 임시 정류장이 설치된 상태다. 약 4년이 걸렸다. 이마저도 설치 당시엔 휠체어가 내려갈 수 있는 경사로를 만들지 않아 버스에서 내린 장애인이 119를 부르는 일까지 발생했다. 또다시 민원을 제기했고 약 한 달이 걸려서야 경사로가 만들어졌다.
#1일 차 낮 12시
세종보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소장으로 근무 중인 문씨는 2021년 5월부터 대전역과 오송역, 세종시청 사이를 오가는 주요 버스 노선인 B1을 상대로 주 2회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B1 노선에는 장애인들이 탈 수 있는 저상버스가 단 한 대도 없기 때문이다. 이날도 문씨는 동료들과 함께 정오에 세종시청 앞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B1 버스를 3분여 동안 막아섰다. 승객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차별버스’라고 적힌 스티커를 버스 전면에 붙였다. 곧 버스기사로부터 반말과 욕설이 날아들었고,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대전시는 지난 3일 B1 버스 노선에 올해 10월까지 2층짜리 전기 저상버스 2대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약 1년 만에 얻어 낸 성과였다.
#1일 차 오후 3시30분
서울행 KTX를 타기 위해 오송역으로 가야 했다. 오후 3시30분경 세종시청 앞에서 특별교통수단인 장애인콜택시를 호출했다. “밤 9시까지 배차 가능한 택시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세종시가 보유한 장애인콜택시는 26대다. 이 중 리프트가 설치된 특장차는 20대고, 실제 운행 차량은 15대에 불과하다. 예약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경쟁이 치열해 원하는 시간에 차량을 예약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긴급한 상황에서 중증 장애인이 실시간 콜택시를 이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2일 차 오전 6시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를 출발해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9호선에서 5호선으로, 5호선에서 다시 3호선으로 환승하며 엘리베이터 5번, 수직 리프트를 1번 탑승했다. 한 문장으로 쓰인 이 경로에는 수없이 많은 틈과 턱이 존재했다. 3호선 종로3가역은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유독 멀었다. 열차에 오르던 문 소장의 휠체어 바퀴가 ‘탕’ 소리를 내며 그 틈에 끼었다. 카메라를 내리고 달려가 그의 휠체어를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오전 7시, 러시아워에 이르기 전 지하철엔 정적이 흘렀다. 바로 옆에서 함께 있던 문 대표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화로운 출근길 풍경인데, 5분 늦으면 시민들이 헐크로 변하네요.’
#2일 차 오전 8시
문 대표는 이날 경복궁역 7-1 승강장에서 열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삭발투쟁에 7차 결의자로 참석했다. 그는 삭발 결의문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이동해야 하며, 교육받아야 하며, 내 몸에 맞는 속도로 노동해야 하며, 다양한 삶을 꿈꾸면서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합니다”라며 “이걸 말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누워야 하고, 계단버스를 온몸으로 막아야 하고, 삭발까지 해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에 너무나 화가 나고 슬픕니다”라고 적었다.
#2일 차 오후 4시
삭발을 마친 문 대표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검은색 모자를 눌러썼다. 그는 “머리는 금방 다시 자라니 괜찮지만, 속상해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서울역 지하철 승강장에서 KTX 승강장으로 이동하고자 교통약자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등산복 차림의 비장애인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문 대표는 “나이가 들면 누구든 몸이 불편해지고, 지하철이나 버스의 계단이 에베레스트산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수 있다”면서 “지금의 투쟁은 소수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로 향한다”고 밝혔다.
#2일 차 오후 6시
해가 기울어질 무렵 오송역에 도착했다. B2 저상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문 대표는 문득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드물게 오는 저상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 30분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쪽이 차라리 더 편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