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당연한 듯 평범한 삶을 누리던 고연수(30)씨가 장애인이 되고 난 뒤에야 깨달은 사실이다. 장애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2020년 5월 어느 날. 고씨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외출했고, 급작스러운 낙상 사고를 당했다.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고 온몸이 골절된 상태였다. 하반신이 마비된 척수장애인이 됐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인지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자신의 몸이 이전과는 다른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돼서야 절망감이 밀려왔다.
◆잃어버린 이동권, 사라진 이동량
‘194.7㎞ → 1.08㎞’. 사고 전과 후, 고씨의 달라진 주간 이동량이다. 비장애인일 땐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지만, 이제 휠체어가 없으면 사실상 외출이 불가능하다. 하루 동안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시간은 보행기를 이용한 약 ‘20분’. 그 이상은 몸이 버티질 못한다.
경기 고양에 거주하는 고씨는 사고 전에는 집에서 16㎞ 떨어진 서울 종로구의 한 여행사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다. 운동을 즐기던 그는 평소 주 3회 정도 집에서 450m 떨어진 헬스클럽을 찾았다. 주말에는 16㎞ 거리에 있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 등의 맛집·카페를 친구들과 함께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일주일 동안 그는 약 194.7㎞의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그러나 사고 이후엔 한 주간 이틀만 외출한다. 총 이동거리는 1.08㎞.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집 앞 270m 거리에 있는 카페에 어머니와 함께 나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나머지 시간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으며 집에 머문다. 가끔 친구들이 자동차를 갖고 찾아와 외출하는 날에야 바람 쐰다는 기분을 느낀다. 고씨는 “집 근처로만 나가고 이마저도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며 “사고 전에는 플리마켓 등을 찾아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의 이동량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장애를 갖기 전엔 몰랐던 제약이 그를 막아서기 때문이다. 휠체어로 이동하며 경사진 길과 갈라진 보도블록을 만날 때마다 아찔하다. 음식점은 입구에 턱이 있으면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어렵다. 장애인콜택시는 실제로 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장시간의 대기가 필요하다. 지하철도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 간격이 넓은 곳이 적지 않아 휠체어 바퀴가 빠질까 봐 늘 두렵다.
◆‘180도’ 바뀐 삶… 지체장애인 91%·척수장애인 87% 후천적 장애
이동이 불편해지자 고씨의 삶도 완전히 달라졌다. 여행이 좋아서 여행사에 입사했던 그는 이제 집 근처도 나서기 쉽지 않다. 일도 자연스럽게 그만뒀고 소득도 줄었다. 장애인 고용 의무 제도에 따라 한 회사에서 블로그 포스팅을 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평균 4시간만 재택근무를 한다. 직장을 구한 것은 다행이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버거운 수준이다.
올해 꽃놀이도 즐기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나가 창문 밖으로 본 것이 전부다. 고씨는 “벚꽃을 구경하고 싶지만 불편한 점이 많아 차라리 포기하는 게 편하다”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근처 강가를 산책하는 것이 큰 낙이었는데, 같이 못 나가는 것이 너무 아쉽다”고 했다.
일순간의 사고로 삶이 달라진 고씨같이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중도장애인’이 많다. 고씨도 경기 일산의 한 재활병원에서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낼 때 자신처럼 사고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여럿 봤다.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 대부분이 비장애인일 때와는 180도 달라진 환경에 불편함을 안고 산다.
18일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신체적 활동에 제약을 갖는 지체장애인(121만5914명) 중 91%가 후천적 요인으로 장애를 가졌다. 사고가 55.2%, 질환이 33%다. 지체장애인은 전체 장애인(262만명) 중 46%를 차지한다. 특히 한국척수장애인협회가 지난해 발표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척수장애인 중 외상으로 장애인이 된 비율은 86.8%다. 자동차 사고가 45.1%, 낙상 사고가 20.8%다. 단체에 따르면 척수장애인은 매년 약 2000명씩 발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씨는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전개하고 있는 ‘이동권 시위’로 촉발된 논란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만, 시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시위에 나섰겠지만 ‘출퇴근 시간에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면서도 “이동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권리인데 시위가 무작정 비난받고, TV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삶이 얼마나 제한되는지를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누가 어떻게 장애를 갖게 될지는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라며 “수술로 잠시 불편을 겪는 것도 장애고, 나이를 먹어 가며 누구나 갖게 될 수도 있다. 단지 빨리 만날지 늦게 만날지 차이기 때문에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상관없는 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장애인들이 왜 저렇게까지 할까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 “이동권 당연한 권리”
김규완(39)씨는 2019년 3월 태국에서 다이빙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목이 부러져 겨드랑이 아래가 마비됐다.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를 꿈꾸며 태국 생활을 한 지 5개월째였다.
자유롭던 삶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고 전에는 밖에서 사진 찍는 것을 즐겼지만 과거의 이야기다. 활동보조인이 24시간 함께 김씨 옆에서 생활하며 돕고 있다.
이동량도 대폭 줄었다. 음악을 만들었던 그는 평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작업실이 있는 마포구 홍대입구역까지 약 8㎞의 거리를 차로 오갔다. 작업실에서 300m 떨어진 체육관은 주 3회 갔다. 김씨는 주말에도 교외로 자주 나가는 등 평균 60㎞를 이동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약 141㎞를 자유롭게 다녔지만 사고 이후엔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김씨는 ‘삶의 질’을 위해 이동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김씨는 “장애인이 되면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고, 계속 우울해진다”며 “맑은 날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동권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대학생 김모(24)씨는 이동권 문제를 개선하면 비장애인을 비롯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수업 때 ‘유니버설디자인’이라는 것을 들은 적 있다. 장애 등과 상관없이 모두를 고려해 디자인하면 비장애인들이 이용할 때도 더 편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이동권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면 좋겠다”고 짚었다.
조한진 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과)는 “이동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육도 받지 못하고 병원도 갈 수 없으며 돈도 벌 수 없다”며 “모두가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다. 하지만 교통수단을 포함해 모든 사회 인프라가 비장애인 위주였으며, 희생된 것은 장애인이었다. 이동권 시위는 장애인을 대접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동권이라도 동등하게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인 만큼, 비난만 하기보다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권의 책임 있는 자세도 촉구했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조장해 온 것은 정치인들이다. 제도적으로 쓸모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쌓아 왔다”며 “인기영합주의에 매몰돼 잘못된 인식을 정치인이 만들어 왔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