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진항에서 배타고 10분 거리 ‘섬속의 섬’/푸른 바다와 노랑 유채꽃 사이 초록 청보리 물결 일렁/어디 있었도 그대는 아름다운 화보가 된다
봄은 노랑이다. 여리여리한 연노랑 산수유가 기지개 켜면 이에 질세라 유채꽃과 개나리는 진노랑으로 앞다퉈 피어 더 짙어진 봄내음을 전한다. 마로니에 노래 ‘칵테일 사랑’에서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연인에게 향기를 안겨준 꽃 프리지아도 사랑스러운 노랑.
‘섬속의 섬’ 제주 가파도 소망전망대에 섰다. 넓은 들판에 끝없이 펼쳐진 노란 유채꽃과 푸른 바다. 그리고 둘의 경계지점을 정확하게 초록색으로 물들인 파릇파릇한 청보리 물결. 마치 노랑 물감과 파랑 물감을 섞어 초록색을 만들어낸 것처럼, 자연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낼까. 신기하다. 그대로 떼어내 집 거실에 예쁘게 걸어 두고 오래오래 즐겨야지.
■가파도 갈까 마라도 갈까
고민이다. 가파도를 갈지, 마라도로 갈지.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풍랑이 심해 제주에 딸린 섬 여행을 번번이 놓쳤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런데 막상 두 곳을 놓고 고르자니 쉽지 않다. 제주도 서남부인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운진항에서 가파도는 배로 10분, 마라도는 25분 거리. 국토 최남단 마라도는 해풍이 만들어낸 해식동굴과 기암절벽의 놀라운 자연경관이 압도하고 일출과 일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니 많이 끌린다. 더구나 신선한 톳과 해산물이 어우러진 짜장면을 먹으러 마라도를 찾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요즘 짜장면 맛집이 몰려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한참 고민하다 가파도로 낙점한다. 마라도는 들판과 바다, 억새와 어우러지는 풍경이 장관이라니 가을에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서다. 반면 가파도는 봄이 가장 여행하기 좋단다. 노란 유채꽃과 초록 청보리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환상이고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과 쌍벽을 이루는 청보리 아이스크림도 맛볼 수 있다니 이때를 놓칠 순 없다.
오랜만에 찾은 제주의 봄을 여유 있게 즐겨 볼 요량으로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운진항으로 차를 몰아 달린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10시30분. 이른 시간이니 바로 배를 탈 수 있겠지. 아니다. 매표소로 들어서자 가파도 들어가는 승선권을 구매하려는 여행자들로 북적대고 긴 줄은 돌고 돌아 건물 밖으로 이어진다. 1시간가량 줄을 서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는 배편을 겨우 구했다. 온라인으로 사전예매하면 편했을 텐데. 후회가 밀려오지만 성수기에 표를 구한 것만 해도 다행이다.
포털사이트에 ‘마라도가파도 정기여객선’을 검색하거나 ‘가보고 싶은 섬’ 앱을 내려받아 예약하면 된다. 4∼5월에는 예약이 몰리기 때문에 최소 5일 전에는 예약해야 원하는 시간의 배편을 얻을 수 있다. 보통 때는 오전 9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하지만 청보리가 피는 4∼5월에는 오전 8시4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운항한다. 천천히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리기에 돌아오는 배편은 3시간 정도 여유를 두는 것이 좋다. 요금은 왕복기준 성인과 청소년 1만8000원, 초등학생 9000원. 배편 10%는 현장발매 분량으로 남겨놓기에 현장에서도 승선권을 구입할 수 있지만 성수기는 긴 줄을 서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제주 바다의 맛, 멜쌈밥 먹어봤나요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는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라 맛집 폭풍 검색에 나섰다. 제주 올 때마다 흑돼지와 갈치를 먹다보니 좀 물리는 듯했는데 ‘멸치의 꿈’이란 식당 이름에 눈이 번쩍 띈다. 운진항에서 차로 2분 거리. 층고 높은 깔끔한 식당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멸치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멜국수, 멜튀김, 멜회무침, 멜국 등 멸치의 다양한 변신을 맛볼 수 있는데 가장 무난한 멜쌈밥을 주문했다. ‘멜’은 멸치의 제주 방언. 2인 기준 3만5000원인 멜쌈밥은 배추가 담긴 멜국부터 나온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 맛을 보니 주방장 솜씨가 보통 아니다. 넉넉하게 담긴 굵직한 멸치는 비린내 하나 없이 고소하다. 쌈과 함께 먹는 멸치조림은 넓적한 돌냄비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다. 쌈 한두 장을 포개 밥을 놓고 그 위에 멸치조림 한 숟가락 얹어 입안에 넣으니 제주 바다가 통째로 밀려 들어온다. 알고보니 1963년부터 제주산 멸치를 유통하던 주인장이 몇 해 전 식당을 열었단다. 멸치가 싱싱하고 맛있는 이유가 있구나.
여유 있는 점심을 즐기고 운진항 주변을 산책한 뒤 가파도를 오가는 정기여객선 ‘블루레이’에 올랐다. 294명을 태울 수 있는 배로 제법 크다. 1층에 편안한 좌석이 있지만 바다 풍광을 즐기는 2층이 인기. 뱃머리에 큐피드 화살이 관통한 빨간색 하트 포토존은 이미 왁자지껄하다. 깔깔대며 경쟁적으로 예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짙은 코발트블루 사파이어를 쏟아부은 듯한 바다를 가르며 항구를 출발한 배는 산방산과 한라산이 겹치는 풍경을 점점 멀리하더니 10분 만에 가파도에 닿는다.
■‘노랑+파랑=초록’… 청보리 물결 넘치는 가파도의 봄
가파도를 즐기는 방법은 두 가지.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데 자전거가 강추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 작은 섬으로 거의 평지여서 자전거로 구석구석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유일한 섬이다. 동서 1.3㎞, 남북 1.4㎞ 크기의 가오리 모양 섬으로 가장 높은 소망전망대가 해발고도 20.5m에 불과하다. 주요 포인트만 보려면 걷는 것으로도 충분하지만 가파도의 모든 매력을 즐기려면 자전거가 좋다.
올레길 10-1코스인 가파도는 다양한 길을 따라 여행하는 재미가 있는데 소망전망대가 중심이다. 선착장에서 서쪽으로 가다 카페 ‘꼬닥꼬닥걸으멍’에서 왼쪽길로 접어들자 제주의 운치가 한껏 담긴 예쁜 돌담길이 이어진다. 15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직접 파서 식수와 빨래터로 사용하던 상동 우물을 지나면 탄성이 쏟아진다. 왼쪽이 온통 노랑과 파랑으로 칠해졌다. 드넓게 펼쳐진 유채꽃밭이 하늘과 만나 지평선을 이루는 풍경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여행자들이 꽃속에 푹 파묻혀 사진 찍느라 바빠진다. 하지만 이곳은 가파도 절경의 서막에 불과하다. 조금 더 길을 오르자 이번에는 오른쪽이 초록과 파랑으로 채색됐다. 씩씩하게 자란 청보리가 하늘·바다와 만나는 풍경이라니. 자전거를 탔지만 계속 멈추게 되니 걷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소망전망대에 오르자 유채꽃, 청보리, 바다와 하늘이 순서대로 펼쳐지며 노랑, 초록, 파랑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저 멀리 산방산과 한라산까지. 봄날에 가파도 오길 참 잘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얀 풍력발전기 너머 마라도가 선명하다. 전망대에서 중앙길로 내려선 뒤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가파도에서 보리밭이 가장 예쁜 길을 만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하얀 풍력발전기 2대와 허리 높이까지 자란 초록 청보리, 그리고 드문드문 박힌 보라색 유채꽃은 대충 셔터를 눌러도 인생샷이다.
대부분 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앙길로 이동하기에 이곳을 잘 모르는데 절대 놓치지 말기를. 길은 가파도를 한 바퀴 도는 해안도로와 만나며 동쪽으로 ‘마라도가 가장 잘보이는 길’과 ‘저녁이 아름다운 길’로 이어진다. 이제 자전거 패달을 힘껏 밟을 차례.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휘날리는 봄바람 따라 스트레스도 훨훨 날아간다.
고양이를 닮은 ‘고냉이돌’을 지나 가파포구에 도착하면 청보리밭이 그려진 담벼락과 옷가게 등 예쁜 상점이 여행자를 반기고 포구 해녀촌식당에서는 싱싱한 해산물이 유혹한다. 상동 동쪽 일출전망대와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 산방산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사진찍기 좋은 어멍아방돌이 계속 등장해 지루할 틈이 없다. 개엄주리코지에서 왼쪽 높은 돌담길로 들어서면 다시 유채꽃과 청보리밭이 등장하며 소망전망대로 돌아간다.
가파도 여행의 마무리는 청보리 아이스크림. 선착장과 산방산, 한라산 정상까지 한꺼번에 즐기는 블랑로쉐가 2층 테라스가 인기다. 봄바람과 푸른 바다를 즐기며 볶은 보리를 듬뿍 얹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깨물자 달콤함이 온몸을 누비며 여행의 피로를 씻어준다. 며칠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 달래며 배에 오른다. 점점 멀어져가는 가파도. 안녕, 내년 봄에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