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인천 산업유통단지의 낡은 창고에는 박스들이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옆구리가 터진 상자 사이로 삐져나온 물건에는 ‘청와대’를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했다. 상자에는 머그잔, 커피 드리퍼, 홍삼진액 등 시중에서는 판매할 수 없는 청와대 직원용 기념품이 들어 있었다. 이 물건들은 15년간 청와대 매점을 운영했던 지체장애인 김모(55)씨가 수년째 보관 중이다.
엄격하게 관리돼야 할 청와대 기념품이 인천의 허름한 창고에 방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15년간 허술한 관리?… 갑자기 감사 왜 벌였나
사건의 발단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일 세계일보 취재에 따르면, 감사원은 그해 3월12일부터 같은 달 28일까지 청와대에 대한 감사를 벌였고 6월에 감사 결과를 발표하며 김씨가 처음 청와대에 들어간 2003년부터 매점 운영권을 경쟁입찰이 아닌 수의계약 방식으로 맺은 것을 문제 삼았다.
감사원은 청와대 매점 감사결과 통보서에서, 청와대가 공공청사 내 김씨가 운영한 매점이나 다른 이가 운영한 카페는 운영 여건이 다른 인근 지역의 임대 사례를 기준으로 임대료를 산정했으며 특혜의 시비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인근 카페와 사용료는 80여만원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매출액은 15배에 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청와대는 새로 업체를 선정하는 데 따르는 보안 문제와 사회적 약자나 독립유공자 등에게 운영권을 주는 원칙 등에 따라 장애인인 김씨와 계속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감사원의 결과대로라면, 그간 노무현정부 때부터 청와대가 특혜를 그대로 방치한 게 된다. 10년이 넘도록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셈이다.
감사원이 그간 방치했던 청와대 내 매점이나 카페에 대해 갑자기 감사를 벌인 부분도 의구심이 인다. 감사원 역시 청와대 감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청와대는 6월 감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인 4월부터 매점에 대한 경쟁입찰을 공고했고, 그 결과 김씨는 탈락했다. 김씨는 감사 결과가 나온 지 한 달도 채 안 된 7월에 매점 운영을 접었고 그 과정에서 기념품 재고를 떠안게 됐다.
◆“입찰 들러리 섰다… 단가 높아 별로 남는 것 없어”
김씨는 감사나 입찰이 청와대에 밉보인 자신을 내보내기 위한 수순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는 “입찰 전 한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당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입찰에 참여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복수의 업체가 입찰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들러리를 선 게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감사 결과에 대해서도 억울함을 토로했다. 김씨는 “기념품 매출이 많기는 하지만, 납품가가 높기 때문에 남기는 건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제작 업체에 보낸 요청서에 따르면 1만3000원짜리 머그잔 기념품의 납품 단가는 1만1000원이다.
장애인인 김씨는 노무현 정부시절 계약 조건에 맞춰 청와대에 입점했는데, 문재인정부가 자신이 그동안 마치 특권을 누려온 사람처럼 취급했다고 항변했다. 김씨는 “보수 정부에서는 이전 정부 사람 취급을 받았기에 언제 나가게 될지 몰라 기념품을 많이 찍지 않았다”며 “문 정부가 갓 들어온 뒤에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노무현정부 때 입점한) 당신은 우리 사람인데 무엇이 걱정이냐’고 말하며 기념품을 많이 생산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김정숙 여사가 문 대통령의 고향 마을인 거제도 남정마을에 방문해서 선물했던 벽걸이시계 등 문 정부 초반에는 대통령 공식 기념품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어, 김씨가 만든 기념품을 행사에 사용했다.
새로 들어 온 직원들도 매점에서 판매하는 기념품을 많이 찾았다. 실제로 2018년 6월 한 달간 청와대 기념품을 택배로 발송한 건수만 594건이다. 매점에서 직접 기념품을 구입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다. 그가 기념품을 여유 있게 준비한 이유다.
◆청와대 계약서 안 남겨… 재고 처리 방법 없어
이런 상황에 청와대가 자신을 내보내며 남은 물건을 인수해 주거나 이렇다 할 처리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게 김씨 주장이다.
김씨는 “다음(으로 청와대에 입점한) 업체는 놓고 나가면 팔아주겠다는 불확실한 말을 하며 기념품 인수를 거부했고, 총무과 관계자들은 나 몰라라 했다”며 “다음 업체에 말 잘해달라는 부탁마저도 손사래 쳤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청와대에서 나오기 전, 두 달 가까이 애원하다시피 매달렸지만 물건값을 받지 못하고 5억원 넘는 재고를 떠안아야 했다는 설명이다.
일반 기업이나 관공서 매점이라면 ‘재고떨이’라도 하겠지만, 청와대 마크가 찍힌 물건은 청와대 직원들에게만 팔 수 있고, 시중에 마음대로 유통하거나 선물할 수조차 없다.
청와대 매점 운영을 규정한 국유재산 유상 사용허가서에 따르면, 기념품 제작 업체 선정과 품목 결정 시에는 총무비서관실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또 월 단위로 판매실적을 제출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이런 관리 조항에도 그가 보상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보상을 받으려면 발주 수량이 담긴 계약서가 있어야 하는데, 청와대가 기념품 제작 계획을 제출하면 구두로 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남아 있는 증빙 서류가 없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청와대 매점 전 운영자를 내보내게 된 경위와 이 과정에서 생긴 재고 처리 문제에 대한 세계일보의 질의에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는 기념품을 얼마나 찍으라고 요구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며 “청와대에 들어온 신구 업체들 사이에 조율이 안 됐던 것으로, 청와대가 업체가 만든 물건을 인수해 줄 수도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이어 “김씨와 재계약을 할 시점이 돼서 감사원에 지적에 따라 그동안 해오던 수의계약이 아닌 경쟁입찰을 했을 뿐 (김씨를) 내보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