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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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칸초네의 도시, 산레모를 빛낸 한국인

70년 넘은 유럽 최고 페스티벌
3000대1 경쟁서 우승한 박종수
아시아인 최초 ‘뉴탤런트’ 1위
세계적 가수로 업적 이뤄내길

라디오 방송으로 인연을 맺은 팝페라 테너가, 스튜디오 복도에서 인사를 한다. 대뜸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다는 말을 꺼내는데, 훤칠하게 키가 큰 젊은 친구가 꾸벅 인사를 한다. 그리고 뒤이은 소개가 놀랍다. “올해 산레모 페스티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헝크 테너, 박종수입니다.” 산레모 페스티벌?

이탈리아 북쪽 휴양도시 산레모에서 매년 개최하는 음악의 산실이 바로 산레모 페스티벌이다. 1951년 첫 번째 행사를 시작한 이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장르 칸초네를 세계에 널리 알린 대회이자, 이탈리아 대중음악, 나아가 유럽 대중음악 흐름을 선도한 페스티벌이기도 하다. 산레모 페스티벌이 성공 가도를 달리자, 유럽 방송연합에서 기본 틀을 본떠 만든 국가대항전이 바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다. 우리나라 지상파 공영방송국에서도 녹화방송이긴 하지만 매년 편성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탈리아 하면 칸초네, 칸초네 하면 산레모라는 공식이 바로 적용되는 엄청난 대회가 산레모 페스티벌인데, 여기서 한국인이 우승을 했단다.

황우창 음악평론가

이탈리아에서는 기성 가수라면 누구나 산레모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고 싶어 한다. 이러니 명성이 자자한 슈퍼스타들은 거의 매년 마음만 먹으면 자주 설 수 있지만,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무대 위에 설 기회가 그만큼 많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탈리아 국영 방송국 라이(RAI)와 산레모 페스티벌 주최 측은 1980년대부터 기성 가수와 신인 가수 부문을 구분했고, 십여 년 전부터는 신인 영재 발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뉴탤런트’ 부문을 새로 만들어 보다 세심하게 신인들의 등용문을 넓혀가고 있다. 즉, 산레모 페스티벌에는 기성 가수 부문, 신인 부문, 그리고 뉴탤런트 부문 등 총 세 가지 경연대회가 있다. ‘헝크 테너’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박종수는 바로 뉴탤런트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뉴탤런트 부문 참가자들은 이름 그대로 신인이라, 대부분 기존 가수들의 유명한 노래들을 부르는 편이다. 하지만 이게 더 어려운 것이, 신인들이 원곡을 부른 가수와 바로 비교 대상이 된다는 일종의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박종수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이 고요한 저녁 바다’(Il Mare Calmo della Sera)를 선택했는데, 안드레아 보첼리도 1994년 당시 이 노래로 산레모 페스티벌에 참가해 신인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이야 그 명성이 대단한 팝페라 테너지만, 천하의 안드레아 보첼리라도 산레모 페스티벌에서는 처음 참가할 때 예외 없이 신인 꼬리표를 달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술 더 떠서 앨범 발표 경력이 없거나 갓 프로 생활을 시작한 가수들은 무조건 뉴탤런트 부문에 참가해야 한다. 여기서 박종수는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가 ‘선배’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불러 우승했다.

부문에 관계없이, 산레모 페스티벌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딱 한 가지다. 자국어인 이탈리아어로 가사가 구성되어 있으면 된다. 국적도 관계없다. 한국인 박종수 이전에도, 호세 펠리시아노나 호베르투 카를루스 등 우승을 차지한 외국인 가수들이 실제로 있었다. 예선부터 본선까지 참가자 경쟁률은 무려 3000대 1. 박종수는 이를 뚫고 동양인 최초로 단독 우승을 차지했다. 문득 현역 테너 가수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오페라 공연을 마치고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데, 공연장 로비에서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할머니 관객 한 분이 한탄을 하시더란다. 요즈음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없다고. 노래 잘하는 사람들은 죄다 한국 사람이고, 이제 우리나라(이탈리아)에는 두 번 다시 베냐미노 질리 같은 가수가 나올 수 없다고. 박종수가 우승했을 때, 당시 심사위원장이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며 남긴 말은 이랬다. “마치 이탈리아가 낳은 전설의 테너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박종수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부디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길 바란다.


황우창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