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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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원격의료, 미래 먹거리로 만들자

코로나19 치료 효용·편의성 확인
급속한 고령화… 국민 76% 찬성
의료계 기득권에 안주할 때 아냐
규제 풀어 ‘K의료’ 선도 기회로

폐암으로 투병하던 장인 어른이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2년간 치료 받다가 돌아가셨다. 팔순이 넘은 여윈 몸을 이끌고 서울의 대형병원에 와 고작 3분여 진료 받고 내려가는 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보라는 지역 병원의 권유에 의한 것이지만 원격진료가 가능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김광준 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지난 6일 ‘비대면 의료서비스 적용 전략’ 포럼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고령 환자가 3분 진료를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시간을 들여 찾아오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우리나라 원격의료는 규제와 정체의 상징이다. 김대중정부 때인 2000년 강원도 16개 시·군 보건진료소에서 첫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하지만 22년 동안 본사업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오진, 약 오남용, 대형병원 쏠림 등을 이유로 무조건 반대해왔기 때문이다. 의료법 개정안이 18대 국회 때부터 제출됐지만 번번이 통과하지 못했다. 문재인정부도 2020년 5월 원격의료 허용의 운을 뗐다가 의사들이 집단 반발하자 슬그머니 발을 뺐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코로나19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원격의료의 필요성과 효용성을 일깨워줬다. 2020년 2월 처음 도입된 비대면 진료는 지난 6일 기준 473만건을 기록했다. 코로나19 재택치료 중 비대면 진료 550만건까지 더하면 1000만건이 넘는다. 그간 원격진료 우려 사항으로 지적돼 왔던 오진, 의료사고 등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근 꼴 아닌가.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 1월 실시한 비대면진료 도입에 대한 국민 설문조사에서 76%가 원격의료 도입에 찬성했다. 경기연구원의 지난해 ‘언택트 서비스 소비자 수요조사’ 때는 88%가 찬성했다. 의료 소비자들은 원격진료 준비가 돼 있고 잠재 수요도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낡은 규제는 국내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 국내 기간통신사인 KT는 최근 베트남 하노이의과대학과 원격의료 서비스 협약을 맺었다. 네이버 자회사 라인도 규제를 피해 일본에서 온라인 진료 서비스를 하고 있다.

미국·일본·중국 등 주요국은 원격의료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1997년부터 원격의료를 시행한 미국은 전체 병원의 50%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원격의료 활용이 38배나 증가했다. 2015년 원격의료를 본격화한 일본은 올해 초진 환자의 온라인 진료까지 허용할 만큼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2014년 원격진료를 허용한 중국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가위생건강위원회(NHC)가 앞장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원격의료를 금지한 건 6개국뿐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IT(정보기술) 강국이라 원격의료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고 있는 만큼 시장을 이끌어 갈 인프라도 탄탄하다. 급속한 고령화로 만성질환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사회적 비용 부담을 낮추고 의료서비스 질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도 원격의료 활성화가 필요하다. 한국판 뉴딜 정책의 첫 사업으로 손색이 없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나.

물론 무턱대고 원격의료를 키우자는 건 아니다. 편리성보다는 안전성이 우선이라는 의사들의 지적은 새겨들어야 한다. 단계적 추진이 필요한 이유다. 재진 환자부터 의원급 중심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고, 대상자도 의료 취약지역 환자나 만성질환자, 거동이 불편한 환자 등으로 제한한 뒤 점차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다. 의사들이 정책 수립에 주도적 참여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의협과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 등과 함께 비대면진료협의체 논의를 시작한 건 다행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풀 수 있는 규제는 다 풀겠다”고 약속한 만큼 규제 혁파에 힘을 실어주길 바란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산업을 방치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원격의료를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늦은 만큼 이제라도 속도를 내자.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