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이상화 생가터 ‘라일락뜨락 1956’/200살 라일락 고목 지금도 봄이면 꽃 활짝/시인 말년 4년 보낸 이상화 고택에도 곳곳서 시인의 향기/‘동무생각’ 작곡가 박태준 풋풋한 사랑 담긴 청라언덕은 이국적 풍경
커피향 가득한 아담한 카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는다. 옆으로 비스듬히 자라면서 작은 마당을 거의 채운 200살 고목은 라일락. 카페 주인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라색 꽃이 활짝 피어 마당이 온통 라일락 향기로 가득 찼는데 좀 늦게 와 안타깝다고 너스레를 떤다. 지금은 ‘라일락뜨락 1956’이란 간판을 단 이곳은 ‘저항시인’ 이상화가 나고 자란 곳. 시인은 매년 봄이면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실어다 주는 라일락 향기를 즐겼겠지. 주인은 가고 없어도 라일락은 ‘이상화 나무’로 남아 시인의 삶을 고스란히 전한다.
#라일락에 묻어오는 시인의 향기
1922년 백조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이상화는 문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굴종을 숙명으로 여기며 친일문학을 일삼던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정기를 지키며 저항시를 썼는데 대표 작품이 1926년 개벽 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초기에는 ‘나의 침실로’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다. 하지만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폭동·방화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자경단과 경찰이 최소 한국인 6000여명을 살해한 ‘관동대학살’을 겪으면서 나라를 뺏긴 민족 현실을 토로하는 저항정신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상화 생가 터는 원래 대구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이지만 1956년 4개 토지로 분할된다. 시인은 18세던 1919년 대구 3·1운동 거사 당시 만세운동 선전물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선전물을 만들던 곳이 사랑채(11-1번지). 그는 이곳에 ‘담교장’이란 현판을 걸고, 독립지사와 문인들을 모아 식민지 현실을 토로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라일락 나무가 있는 곳은 안채(11-3번지). 이상화는 이곳에서 32세까지 살다 가세가 기울자 집을 처분하고 세 차례 이사를 다닌 끝에 계산동 ‘이상화 고택’에서 생의 마지막 4년을 보낸다.
많은 이가 고택을 생가로 알고 있을 정도로 실제 생가 터는 사실상 잊혔던 곳.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다시 부활시킨 이가 ‘라일락뜨락 1956’의 주인장인 시각디자이너 권도훈(51)씨다. 그는 대구근대골목 투어를 하다 4년 동안 빈집으로 방치된 이곳의 라일락 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이에 어렵게 집을 매입해 2018년 10월 카페로 문 열었다. 골목길 입구 담벼락의 이상화 초상화도 그의 작품으로 카페는 시인의 삶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카페에서 ‘상화커피’를 맛볼 수 있는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권씨가 인도네시아 만델링 품종을 핸드드립으로 내린다. 시인은 프랑스 유학을 위해 1922∼1924년 도쿄 ‘아테네프랑세’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만난 여인 유보화와 마셨을 커피를 재현했단다.
깊은 커피향을 즐기며 시인에게 많은 영감을 줬을 ‘이상화 나무’를 바라보니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흑백필름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커다란 몸통을 비틀면서 자란 나무 모습이 독특한데 마치 온갖 풍파에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던 시인의 삶을 그대로 닮은 듯하다. 여러 차례 경찰에 구금돼 고초를 겪은 시인은 대구 교남학교(대륜고) 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어, 영어, 작문을 가르치다 1943년 3월 위암 진단을 받고 한 달여 만에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날은 라일락이 한창 피는 봄날이던 4월25일. 눈을 감으면서도 라일락 꽃향기 흩날리는 생가를 많이 그리워했을 시인을 떠올리니 가슴 한편이 아릿하다.
시인이 말년을 보낸 계산동 이상화 고택으로 들어서자 맑던 하늘이 어두워지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중절모를 쓰고 스카프를 두른 채 롱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이상화 조형물이 인상적인데 인물이 아주 훤칠하다. 고택 마당에는 이상화 연보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세워져 시인을 기린다. 고택은 지역개발로 사라질 뻔했었는데 2002년부터 고택보존 운동이 펼쳐지면서 시민 40만여명이 서명에 참여하고 자금을 모아 고택을 지켜 냈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친구들과 제자들이 모이던 사랑채와 시인의 숨결이 묻어 나오는 안채, 마당의 장독대까지 모두 고스란히 남아 시인의 향기를 전한다.
#‘봄의 교향악’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대구의 대표 여행지 중 하나가 옛 대구읍성 골목을 이어서 만든 대구근대골목이다. 대구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근대골목은 5개 코스로, 청라언덕에서 진골목까지 100년 전 흔적을 따라가는 2코스 ‘근대문화골목’이 가장 인기 높다. 1922년에 발표된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 ‘동무 생각’의 배경이 이곳 청라언덕이기 때문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로 시작하는 ‘동무 생각’은 학창 시절 한 번쯤은 불러 보는 유명한 곡이다.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박태준은 청라언덕을 넘어 계성학교에 다니면서 매일 만나던 신명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했단다.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이은상이 소녀를 영원히 간직하라며 가사를 써 줬고 박태준이 곡을 붙이면서 아름다운 ‘동무 생각’이 탄생했다. 노랫말 속 ‘백합’이 박태준이 짝사랑한 여학생이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란 뜻. 실제 청라언덕에 오르자 푸른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벽돌 건물 3채와 아름다운 정원이 유럽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모두 100년 넘은 근대문화 역사건축물.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개항장 부산을 통해 대구로 온 선교사들은 청라언덕에 모여 살았는데 지금은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 주택 3채만 남아 있다. 커다란 가이즈카 향나무가 멋진 블레어 주택 앞에 ‘동무 생각’ 시비가 세워져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챔니스 주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하던 방갈로풍으로 꾸며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 높다. 스윗즈 주택을 배경으로 가장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붉은 벽돌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은 독특한 건축양식이 돋보이며 위로, 옆으로 자란 두 그루 소나무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빼어나다. 선교사들이 들여온 한국 최초 서양사과나무 3세목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