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이주향칼럼] 내로남불의 인식론

내 편이면 정의·상대편이면 비리
불통과 아집 공격하는 조어 통용
국민의 시선 간과하는 잣대 안돼
지도자는 귀 열고 통합 지향해야

‘한비자’(韓非子)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도 위왕의 총애를 받았던 미자하(彌子瑕) 이야기일 것이다.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자하는 왕의 수레를 타고 궁 밖으로 나가 어머니를 만났다.

위나라는 허락 없이 왕의 수레를 타는 자에게 발을 절단하는 형벌을 내리는 나라였다. 그런데 미자하의 소식을 들은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왕은 얼마나 효자면 발이 잘리는 형벌까지 잊었겠느냐며 오히려 미자하를 두둔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그 미자하가 어느 날, 왕의 정원에서 복숭아를 따서 먹었다. 복숭아가 꽤 향긋하고 달콤했나 보다. 미자하는 먹던 복숭아를 왕에게 건넸다. 이번에 왕의 반응은? 왕은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먹던 복숭아까지 주겠느냐며 미자하에 대한 애정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물론 맹목적인 왕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애정이 식자 왕은 미자하를 향해 허락 없이 왕의 수레를 탄 죄, 먹던 복숭아를 감히 건넨 죄를 물었다.

한비자는 이 일화를 통해 간언할 때는 왕의 호불호를 살펴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내게는 다른 포인트가 더 주목된다. 이 일화에는 내로남불의 뿌리가 있다. 마음 따라 판단이 바뀌는 것, 그리고 언제나 내 마음은 무죄인 것, 아니 내 마음만 무죄인 것,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니 그 마음에 권력이 더해지면 누군가에게는 폭탄이 된다. 한비자는 이 ‘폭탄’에 주목해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역린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충고한 것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이제는 사자성어가 된 것 같다. 그것은 ‘불통’을 공격하는 돌이지만, 그 돌로 역지사지(易地思之)에 이르는 경우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로남불은 아집 혹은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인식의 틀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편이 있는 곳에서 그것은 내 편을 만드는 달콤한 당근이고, 우군과 적군을 가르는 강력한 공격무기다. 내 아이의 아빠 찬스는 자연스러운 사랑이고, 남의 아이의 아빠 찬스는 공정을 거스르는 비리다. 우리 편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것은 신뢰 혹은 우정이고, 남의 편이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은 부정의 카르텔이다. 남이 하면 정치보복인 것도 내가 하면 정의실현이고 법치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남불’을 응징하는 권력의 맹목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법 조항만 들이대는 일은 법치라기보다는 법의 덫에 걸리는 일이 아닐까. 지금은 한비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국민의 시대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상식을 몸으로 배우게 되는 시대다. 종종 그 단순한 사실을 너무 늦게 배운 권력의 비극으로 파괴와 창조를 되풀이한 것이 우리의 현대사에는 있다.

국민은 무서운 에너지다. 그럼에도 한 사람인 왕과 달리 다수의 시선이 모인 국민은 실체가 없어 보인다.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쉽게 자기 하고 싶은 말에 ‘국민을 위하여’란 토를 다는 것 같다.

이번 인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검사 출신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물론 세계를 구성하는 국민의 시선에는 검사의 시선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판사의 시선도 있고, 예술가의 시선도 있다. 직장인의 시선도 있고, 차별이 아픈 소수자의 시선도 있다. 농부의 시선도 있고, 활동가의 시선도 있다. 젊은이의 시선도 있고, 늙은이의 시선도 있고, 실직자의 시선도 있다. 중산층의 시선도 있고, 서민의 시선도 있다.

논리적이거나 감성적이거나 자연적이거나 인간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외롭거나 절망적이거나 두려운 그 모든 시선이 교차하며 대립하며 충돌하며 연대하며 압도하며 섞여 만들어 가는 전체가 국민의 시선이다.

적어도 지도자는 하나의 시선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물론 그 전체를 통합하기란 어렵고도 어렵지만 만남의 폭을 넓히고 귀를 열어 그 통합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도자의 운명 아닐까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