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들의 탄소중립(넷제로) 추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다. 특히 철강과 정유 등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업종의 기업들에 정부의 ‘2050 탄소중립’ 정책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탄소 배출의 주요 ‘범인’으로 눈총을 받는 이 기업들은 탄소중립이 ‘의무이자 기회’라는 인식으로 탄소 사용과 배출을 줄이고 친환경 연료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탄소 배출 최다 철강업계… 저탄소 연료 적용
탄소중립 과제에 가장 절실한 업종은 철강 분야다. 국내 민간기업 중 탄소 배출량이 가장 많은 업종이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아시아 철강사 중 최초로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지난해 기본 로드맵을 발표했다. 포스코는 ‘하이렉스’(HyREX·Hydrogen Reduction)라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을 통해 그린수소와 재생에너지 기반 탄소중립 제철소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수소환원제철은 석탄 등 화석연료 대신 수소를 사용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화석연료와 철광석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만, 수소를 쓰면 물이 나오기 때문에 탄소 배출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 기술인 하이렉스를 활용하면 공급이 제한돼 있고 가격이 비싼 펠릿 형태의 철광석이 아니라 가루 형태의 분광을 그대로 쓸 수 있다.
포스코는 지난 3월부터 ‘탄소중립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김학동 대표이사 부회장이 위원장으로 매 분기 회의를 주재하고, 부문별 탄소중립 로드맵 이행 현황을 직접 점검한다.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등 각종 업무 분야와 관련한 외부 전문가 8명이 참여하는 ‘탄소중립 그린(Green) 철강기술 자문단’도 구성했다. 이들은 포스코가 추진하는 2050 탄소중립 전략에 객관성·전문성을 더해 주고, 대외적 공감대 형성과 산학연 협업 방안 등을 모색하는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안전·환경 부서를 본부 단위로 승격하고, 최고경영자(CEO) 직속의 탄소중립 전문 부서를 설치하는 등 탄소중립을 비롯한 환경 문제를 폭넓게 논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했다.
업계 2위인 현대제철도 꾸준히 에너지 전환을 위한 준비를 해 왔다. 현대제철은 올해 1월부터 김용희 상무를 단장으로 하는 ‘탄소중립추진단’을 운영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석탄 대신 소의 배설물인 우분을 고로 연료로 대체하는 친환경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다. 농림축산식품부, 농협중앙회와 협업을 통해 올해 말부터 우분 고체 연료를 투입하기로 했다. 1t의 우분 연료를 활용하면, 4t의 축산 폐기물이 재활용되면서 1.5t의 온실가스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국내에서 매년 2200만t 정도 발생하는 우분은 대부분 퇴비로 활용되면서 연간 200만t 이상의 온실가스를 발생시켜 왔다. 우분을 제철소 연료로 활용하는 기술은 그간 수거·제조의 문제와 경제성 등을 이유로 상용화가 지연됐지만, 개발 9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됐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성장 한계 예상 정유업계… 친환경 제품 생산, 수소사업 진출
정유사업은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전환이 시대적 대세가 돼 결국 수요의 성장 한계가 닥쳐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넷제로 원유’ 도입, 수소사업 진출, 폐플라스틱 재활용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자회사인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은 미국 옥시덴털사로부터 2025년부터 5년간 매년 20만배럴 규모의 넷제로 원유를 도입하기 위한 계약을 세계 최초로 지난 3월 체결했다. 항공유 기준으로 20만배럴은 서울과 제주도 간 왕복 약 9000회 비행이 가능한 규모다. 넷제로 원유는 채굴부터 정제, 연소까지 원유 생애주기 동안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량과 동일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공기 중에서 직접 포집해 유정에 주입, 영구 저장하는 방법으로 생산된다.
SK에너지는 이번 계약으로 도입되는 넷제로 원유를 정제해 친환경 항공유를 비롯한 다양한 넷제로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2025년부터 기대되는 온실가스 저감량은 ‘스코프3’ 기준 연간 약 10만t으로, 여의도 25배 면적(약 2000만평)에 약 400만그루의 나무를 심는 효과와 같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GS칼텍스는 지난 2월 국내 윤활유 브랜드 최초로 원료부터 제품 용기까지 친환경 가치가 담긴 친환경 엔진오일 ‘킥스 바이오원’(Kixx BIO1)을 출시했다. 이 제품은 바이오 연료 개발업체인 미국 노비사와 파트너십을 통해 야자, 코코넛, 콩, 유채씨 등 100% 재생 가능한 식물 원료로 만든 윤활기유를 사용했다. 윤활기유는 엔진오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원료다. 그뿐 아니라 사용 후 버려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킥스 바이오원 용기에 적용하는 등 원료부터 용기까지 친환경 요소를 더했다.
에쓰오일(S-OIL)은 신사업 분야 중 특히 수소의 생산부터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수소산업 전반에 대한 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올해 초 에쓰오일은 사우디 아람코와 석유화학 신기술(TC2C), 저탄소 미래 에너지 생산 관련 연구개발(R&D), 벤처 투자 등 대체 에너지 협력 강화를 위한 4건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현대오일뱅크는 현재 연간 약 20만t의 수소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수소를 차량용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수소공장에서 생산한 수소를 99.999%의 고순도로 정제하고 압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8월 대산공장에 고순도 수소 정제설비를 구축했다. 하루 생산 가능량은 3000㎏으로 수소차 넥쏘 600대를 충전할 수 있는 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