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후 전북 전주 남부 학산에 자리한 숲속시집도서관. 학교 교실 면적과 비슷한 70㎡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주부와 학생 등 시민 30여명이 옹기종기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이들은 가수로 데뷔한 요조 작가,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10년 넘게 수필과 소설 등을 쓰고 있는 임경선 작가와 함께 ‘책 여행’을 떠났다. 시민 안정숙(41·여)씨는 “처음 방문했는데, 위치와 내부 공간이 매우 독특하다”며 “휴식과 산책에 안성맞춤이고 프로그램도 다양해 자주 찾고 싶다”고 말했다.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은 한 편의 시를 통해 사색하며 차분히 휴식할 수 있는 시 특화 도서관으로 지난해 4월 학산 숲속에 둥지를 틀었다. 한적한 작은 저수지인 맏내제 주변에 만개한 아카시아와 이팝나무의 꽃향기를 따라 숲으로 10분 남짓 걸어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내부는 목재로 꾸몄고 작은 다락방도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 유명 시집과 시화집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언어로 묘사한 외국어 원서 시집을 접할 수 있다. 매월 인기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 시간을 통해 시를 써 보고 낭독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음악 예술인과 함께하는 낭독공연도 연다.
뒤편 숲속에는 아이들을 위한 숲 체험원이 자리해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특히 인기다. 어린이들이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동안 부모는 복잡한 일상을 한 줄의 시처럼 정리하기에 그만이다.
◆‘열공·도서 대출’ 옛말… 책과 함께 놀고 즐기는 ‘시민 휴식처’
전주시가 ‘도서관의 도시’로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도심은 물론이고 공원, 야산, 호수, 시청 로비, 심지어 도로 등 발길 닿는 곳 어디든 이런 크고 작은 도서관을 만날 수 있다. 공부하고 책만 빌리는 공공도서관은 옛말이다. 책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대가 어우러져 소통하고 차를 마시거나 휴식하고 뛰어놀며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혁신 공간이다. 이 지역에서는 ‘개방형 창의 도서관’으로 부른다.
금암도서관이 대표적이다. 구도심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이곳은 1949년 전북도립도서관으로 개관해 이 지역 12개 공공도서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올해 초 온 가족이 즐기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완전히 변신했다. 고지대의 특성을 이용해 지붕은 푸른 하늘과 마주하도록 유리로 꾸몄다. 1∼2층은 바닥과 벽면을 없애 탁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어 끝없이 이어지는 책장과 책 속의 미로는 더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림을 감상하는 전시 공간과 개방형 카페, 휴식 공간이 함께 자리했고 북콘서트나 동화 낭독극 등도 펼친다. 완만히 경사진 2층 지붕 한쪽은 나무 바닥의 트인마당으로 만들어 발밑에 펼쳐지는 도시 전경을 내려다보며 사색하거나 휴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2019년 말 전주시 12번째 공공도서관으로 문을 연 ‘꽃심’은 전북지역에서 유일하게 학습실이 없다. ‘정숙’과 ‘학습’으로 대변되던 도서관이 눈치 보지 않고 책과 함께 웃으며 뛰어놀 수 있는 책 놀이터로 탈바꿈한 것이다. 꽃심에는 전국 최초 ‘트윈세대’(12∼16세) 전용 독서 공간이자 놀이·탐구·체험 혁신 공간인 ‘우주로1216’이 자리한다. 공간 기획·설계부터 운영까지 청소년들이 참여한 이곳은 2020년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과 ‘생활SOC 우수사례 공모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호평받았다.
◆‘산·도로·공원·호수…’ 발길 닿는 곳마다 ‘테마형 도서관’ 즐비
전주에는 창의적인 공간 혁신을 통해 쉼터로 변모한 공공도서관이 수두룩하다. 평화도서관은 ‘야호 책놀이터’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위한 책 놀이터로 새로 자리매김했다. 삼천도서관은 1층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놀이터를 만날 수 있다. 책과 영화를 주제로 한 인후도서관, 가족이 함께 저자 강연을 듣고 글쓰기를 하는 송천도서관도 시민의 ‘쉼’과 ‘힐링’ 공간이다.
전주시는 생활권 곳곳에 주제별로 특화하거나 특색을 지닌 특성화 도서관을 조성했다. 전주역 앞 첫마중길과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다가동 전라감영 인근에 ‘여행자 도서관’을 잇달아 개관해 방문객에게 다양한 여행 정보를 제공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올해 한옥마을에도 추가로 문을 연다. 산책과 등산으로 시민이 즐겨 찾는 도심 야산 건지산의 ‘숲속작은도서관’은 환경과 어우러져 독서와 휴식을 동시에 누리고 다양한 생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전주시청 로비는 도서 8700여권을 구비한 ‘책기둥 도서관’으로 변신해 열린 문화 공간으로 주목받는다. 책을 쓰고 출판하는 ‘자작자작 책 공작소’도 인기다.
전주에는 현재 공공도서관 12곳과 공·사립 작은도서관 139곳이 분포해 있다. 10년 전보다 각각 5곳(71.4%), 86곳(62.2%) 늘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도 43만명 이상이 찾아 100만권 넘는 도서를 대출해 갔다. 이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전주를 찾은 이들은 최근 3년4개월 동안 388개 기관, 4360명이나 된다. 전주시의 창의적인 도서관 정책은 지난해 ‘전국 기초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지역문화 활성화 분야 최우수상을 받았다.
전주시는 특색 있는 도서관 건립을 지속한다. 올해 들어서는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첫 번째로 도서를 기증한 ‘헌책도서관’을 비롯해 길이가 100m가 넘는 ‘아중호수도서관’, 동학농민혁명 등 혁명을 주제로 한 ‘혁명도서관’ 등 특화 도서관을 6곳 신축한다. 내년에는 자연친화 생태교육을 주제로 한 ‘천변생태도서관’ 등 특화 도서관 4곳과 놀이·휴식이 있는 책 놀이터를 만든다.
최락기 전주시 책의도시인문교육본부장은 “고정관념을 깬 도서관이 시민의 무한한 상상력을 일깨우는 창의적 공간이자 새로운 여가문화 마당이 되고 있다”며 “평생학습 시대, 다양한 학습 수요를 충족하고 사람과 생태, 문화의 가치 구현이라는 도시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특화한 도서관을 지속적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승수 전주시장 “인문학적 생태·문화 조성… 지역발전의 마중물 될 것”
“변화의 시대, 책 속에서 길을 찾고 담대하게 성장하는 도시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김승수(사진) 전주시장은 18일 ‘책의 도시, 도서관의 도시’로 변모 중인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책을 쓰고, 출판하고, 팔고, 읽는 도서 생태계를 만들어 시민이 행복하고 지역의 가치를 드높이는 인문학의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시장은 “‘더 부자일 수 없어도 더 행복한 도시’가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사람·생태·문화의 가치를 실현해 왔다”며 그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 도서관 등 공공장소를 꼽았다. 그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으나, 그동안 권력과 폐쇄성의 상징이었던 공공장소를 시민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개방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많은 공공도서관을 개방형 창의 도서관으로 혁신하고 시청 광장을 시민 휴식처로 제공했으며, 도시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숲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도서관을 세대 간 소통이 이뤄지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우는 곳으로 탈바꿈시켜 시민 삶의 중심에 자리하게 했다”고 밝혔다. 시민들이 유명 카페나 유료 놀이터 대신 숲 놀이터, 책 놀이터, 도서관 휴식 공간에서 여가를 즐기고, 또 인생의 책을 만나거나 큐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품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 시장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데,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그 길을 한 권의 책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재선 시장인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시민을 진짜 사랑하는 방법의 하나가 부족함을 느낄 때 내려놓는 용기”라며 “특화한 많은 도서관에서 시민들이 인생의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삶의 성장을 이루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 시장은 “당장의 도시 성장과 규모 확대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든든한 인문학적 기반이나 확고한 도시 정체성이 없으면 그 도시만의 역사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책과 도서관을 통한 지역문화의 힘이 시민의 꿈과 비전이 되고 미래 세대를 키우는 든든한 기반이자 지역발전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