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당했던 비행기 한 대가 런던 외곽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는 국내선이었던 관계로 현지 복장을 한 아이라든가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백발 신사도 섞여 있었다. 비행기가 도착한 다음 날, 많은 사람들이 영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연로한 백발 신사는 왜 자신의 나라를 떠나서 영국에 남기로 결정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고 동시에 또 다른 생각으로 퍼져나갔어요. 그가 떠나온 사회에 대해서 내가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한 좋은 이유가 혹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난민 지위로 영국에 입국한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어떤 숙소를 제공하는지 등에 대한 공영방송 BBC 보도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BBC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영국에 망명해온 체코 집시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 사회 난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머릿속에는 소설 영감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가족 간 갈등도 포개졌다. 누가 집을 가져가고, 부를 둘러싸고 어떻게 대물림이 되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고, 많은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빼앗기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겹쳐졌다. 즉, 1997년 동아프리카 잔지바르를 방문했을 때, 세상을 뜬 이웃이 탐욕스러운 조카를 속여서 자신의 딸들에게 집을 물려준 이야기를 가족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삶과 사상이 응축된 장편소설 『바닷가에서』(문학동네)는 이렇게 세상에서 태어났다. 작품은 2001년 부커상 후보,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공식 인터뷰에 이어 세계인들 앞에서 낭송된 그의 대표작이다.
2001년작 『바닷가에서』는 ‘샤아반’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영국에 입국했다가 수용소에 억류된 예순 다섯의 잔지바르섬 출신 난민 살레 오마르와, 역시 삼십여 년 전인 십대 때 잔지바르를 떠나서 동독을 거쳐 영국에 정착한 문학교수 라티프 마흐무드가 왜 오마르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으로 입국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창문 너머 바닷가가 보이는 곳에서 대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1장 ‘유물’은 오마르 시선으로, 2장 ‘라티프’는 라티프 시선으로 각각의 진실을 들려준 뒤, 3장 ‘침묵’에서 다시 오마르의 시선으로 오마르와 라티프가 대화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 전 망각된 진실과 비극의 전모를 대면하면서 함께 과거로부터 걸어 나온다.
“어쨌든, 당신은 명예니 예의니 용서니 하는 말들을 너무 많이 하십니다. 그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저 말일 뿐이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약간의 친절함이 전부라고, 그것도 운이 좋을 때나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의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런 과장된 말들은 그저 우리 삶의 무의미함을 감추기 위한 표리부동한 언어의 일부일 뿐이에요.”(392쪽)
식민주의와 난민의 운명을 천착해온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섬 난민 출신 영국 소설가 구르나는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출신 비백인 수상자로는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이후 35년 만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당시 구르나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식민주의 영향과 대륙 간 문화 간 격차 속에서 난민이 처한 운명을 타협 없이, 연민 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고 평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구르나는 어떤 문학 세계를 그려왔을까. 그는 왜 소설가로서 세상에 서지 않으면 안됐을까. 작가 구르나를 대표작 『바닷가에서』를 비롯해 초기작과 최신작인 『낙원』(1994), 『그후의 삶』(2020·이상 문학동네)의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열린 지난 18일 줌라이브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난민 문제와 함께 한국민들도 경험한 식민주의를 다뤘는데.
“한국 역사에 대해서 조금 아는 바가 있는데, 책 『바닷가에서』가 한국에 있는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작가로서 더 없이 큰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 갖고 있는 즐거운 측면이 아닐까. 다른 이야기 또는 다른 나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의 상황, 사회와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 말투를 서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공감을 하는 등 문학적 장치들도 보인다.
“모든 영국 백인들이 문학적인 레퍼런스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가운데 나이 많은 오마르가 영어를 못하는 척하면서도 「필경사 바틀비」의 인용구를 써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장난스럽게 게임을 하듯이 단서를 남기고 있다. 창문을 내다보고 까만 벽을 바라보는 소설 속의 장면이 멜빌의 작품에 나오는 것처럼, 어떤 문학적인 단서를 남긴 장치라고 이해해 주면 되겠다. 다른 문학적인 인용이라든지 레퍼런스가 바로 글을 쓰고 또 글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독자로서 작가로서 어떻게 보면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은 장난스러운 게임에 참여하는 효과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소설은 왜 오마르가 영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샤아반이라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사용했을까, 라는 라티프의 의문을 따라서 서서히 움직인다. 그런데, 오마르는 왜 라티프 부친의 이름을 사용했을까.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증명서를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에게 주었어요. 그는 죽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죽은 아이들의 출생증명서를 종종 손에 넣었고, 누군가가 여권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이가 얼추 비슷한 사람,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나이쯤 되었을 아이의 증명서를 찾아서 그 이름으로 여권을 신청했습니다...그래서 나는 당신 아버지가 되어 그 이름으로 된 여권을 취득했어요.” (392쪽)
잔지바르 섬에 영국 식민주의가 도래했을 시기,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과연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성장기를 겪었을까. 세월이 흘러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17년 만에 고향 잔지바르를 다시 찾았던 1984년, 구르나는 연로한 아버지가 길 건너편 모스크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뜩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이때의 영감은 10년 뒤 초기작 『낙원』으로 이어졌다.
『바닷가에서』와 함께 번역 출간된 1994년작 『낙원』은 12세 소년 유수프가 작은 호텔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빚 때문에 볼모로 잡혀서 상인들과 함께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까지 여행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가장 최근작인 『그후의 삶』은 20세기 초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의 저항을 진압하고 식민 지배한 이후의 삶과 식민주의의 민낯을 각각 담고 있다.
―장편 『낙원』과 『그 후의 삶』은 어떤 의미인지.
“『낙원』은 1914년에서 1918년까지 동아프리카 당시 탄게니카로 불렸던 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자 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작품을 쓰고자 했다.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 어떻게 식민주의에 휩쓸리고 또 그러한 여정을 걷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30년 후에 쓰여진 『그후의 삶』이라는 소설에서 보다 깊이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두 소설은 엄청난 시간적 간극에도 깊게 연결되어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주의적인 아프리카 역사를 살펴보는 작품이다.”
구르나는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세 작품을 비롯해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식민주의와 난문 문제에 천착해왔을까. 그는 이와 관련,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일어났던 일이 변형되거나 심지어 생략되었고 그 순간의 진실에 부합하도록 재구성되면서 새로운, 단순화된 역사가 세워졌습니다. 이 새롭고 단순화된 역사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구성할 자유를 가진 승리자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진 적 없고 자신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에 들어맞는 틀을 통해서만 우리를 보는, 그리고 인종 해방과 진보에 대한 익숙한 이야기를 원하는 논평자나 학자, 심지어는 작가들에게 편리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사물이, 건물이, 사람이 겪은 수모를 보았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이가 빠진 사람들이 행여 과거의 기억을 잊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는 동아프리카 식민주의의 기억과 진실이 승리자의 입맛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변형, 왜곡, 생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정한 기억을 복원하고 싶었다. “과거를 증언하는 여러 유형물과 건물과 업적을 무시하고 삶을 가능케 했던 애정을 도외시한 이런 역사를 거부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습니다....그 기억을 보존하고, 거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쓰고,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순간들과 이야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자축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폭력과 잔혹성을 써내야만 했습니다.”
글쓰기는 소년 압둘라자크 구르나에게 언제나 즐거움의 하나였다. 구르나는 소년 시절 이야기를 쓰기 위해 따로 배정된 수업, 다른 어떤 수업보다 선생님들이 자신들에게 더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 수업을 고대했다. 학생들은 기억과 상상에서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책상에 기대어 침묵하곤 했다. 젊은 시절 특별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 기억에 남는 경험을 회상하거나 주장하는 의견을 표현하거나 불만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담론 능력을 향상시키는 교사 외에 다른 독자도 필요하지 않았다. 글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런 연습에서 즐거움을 찾았기에 글을 썼다고, 구르나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회고했다.
1948년 영국 보호령이던 동아프리카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21세이던 1969년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한 뒤 거의 20년 만인 1987년에야 첫 장편소설 『떠남의 기억』을 펴냈다. 페르시아어로 ‘검은 해안’을 뜻하는 잔지바르가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4년 혁명이 일어나면서 부족 갈등과 아랍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박해가 격화하자, 1968년 ‘학생 비자’로 영국으로 이주했고 그해 1968년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18세 때 영국에 이주해서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소설에서 주인공 오마르는 향을 가지고 런던에 도착하는데,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저는 18세의 젊은 청년이었기에 그렇게 깊은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고, 작은 가방에 옷가지와 갈아입을 속옷 등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언제 어떤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잔지바르에선 재미였던 글쓰기는 영국에 이주한 뒤에는 전혀 다른 게 돼 갔다. 그러니까, 영국으로 이주한 뒤에 비로소 조국에서 벌어진 사건의 의미와 영향을 반추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마음속에서 큰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기억의 힘에 저항하거나, 사건들과는 다른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밝혔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했던 위해의 추악함을 곱씹어보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했던 거짓말과 망상을 재고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무수한 잔학 행위에 대해 침묵한, 불완전한 역사였습니다. 우리의 정치는 인종차별적이었고, 그로 인해 혁명에 뒤이어 곧 박해가 이뤄졌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딸이 어머니 앞에서 폭행을 당했습니다. 영국에 살면서 나는 그런 문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선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시간의 결과를 계속해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머물렀다면 기억의 힘에 저항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들과 무관한 다른 기억들 때문에도 괴로웠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학대, 사회적 젠더적 도그마로 인해 온전한 표현을 억눌려야 하는 사람들, 가난과 의존을 묵인하는 불평등 같은 것들이요. 이런 문제들은 우리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에 존재하지만,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괴로움은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치고, 남겨진 자들을 떠나 스스로의 안전을 찾아간 이들이 안고 있는 마음의 짐일 것입니다. 결국 나는, 아직 정돈되거나 체계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있는 혼란과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명확하게 만들어 이 고통을 완화하고자 내가 반추한 것들에 대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장편소설 『떠남의 기억』을 쓴 이래, 그는 『순례자의 길』,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등 주로 식민주의와 난민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 10편과 많은 단편소설들을 써왔다.
―동아프리카 이야기를 계속 써왔는데, 영국 독자들의 반응이 어땠나.
“저는 1980년대 말에 첫 작품을 출간했는데, 그 전에도 이미 샬만 루시디나 치누아 아체베(Albert C. Achebe) 등 다양한 비영국 출신 작가들이 활동 중이었다. 1986년에는 월레 소잉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정도로, 1950년대 이후 비영국 또는 비영미권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분위기 속에서 첫 작품을 출간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작가 출신보다는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을 보였다.”
―기존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과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저는 무엇보다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지주의 둘 사이의 조우 또는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는 위대한 아프리카 작가 치누아 아체베가 풀어나간 주제이기도 하다. 응구기 와 티옹오(Ngugi wa Thiong'o) 작가의 작품 『한 톨의 밀알』에서도 이런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주제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게 절대로 아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이 문화적 또는 종교적으로 전 세계 다른 지역들과 교류를 하면서 수백 년간 많은 역사를 쌓아왔다. 다층적인 측면을 살펴봐 왔기 때문에 단순하게 동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라곤 볼 수 없다. 동시에 이 지역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동시대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구르나는 동아프리카와 유럽을 배경으로 식민주의와 난민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문학이 역사와 다른 영역이 있음을 직시했다. 즉, 소설이나 문학은 그저 싸움이나 논쟁을 위한 것일 수만은 없고, 어떤 특정한 사안이나 이런저런 쟁점이나 관심사만도 아니며,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의 삶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밝혔다.
“궁극적으로 글쓰기의 관심사는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결국 잔혹성과 사랑과 나약함이 그 주제가 됩니다. 나는 또한 글쓰기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악랄하게 지배하는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명백하게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핍박에도 어떻게 자긍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도 매우 진실되게, 그 추함과 미덕이 모두 나타나 인간 존재가 단순화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써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썼을 때 비로소, 어떤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왜 영어로 소설을 썼는지. 작품에는 영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도 나오는데.
“작가로서 언어와 굉장히 가깝고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영어라는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지만, 배웠기에 가깝게 느껴졌다. 모국어인 스와힐리어에선 느낄 수 없었던 어떤 친밀감을 영어에서 느꼈기에 영어로 글을 쓰게 됐다. 동아프리카는 전 세계 다양한 곳과 교류를 하면서 다언어, 다문화적인 지역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스와힐리어뿐만 아니라 아랍어, 힌디어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모스크라든지 힌두사원이라든지 성당이라든지 기도실이라든지 다종교적 측면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로 쓰여진 소설 안에서 다른 언어가 종종 발견되는 것 같다.”
―글쓰기나 소설 전략이나 방법, 패턴이 있다면.
“저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써야겠다고 정해놓고 시작하기보다는 하나의 아이디어, 생각에서 시작하는데, 그런 생각은 종종 제 주변에서 제 눈길을 끄는 것들에서 비롯된다. 10편의 장편소설을 지금까지 써왔지만 이어서 쓴 것은 아니고 5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집필을 해왔다. 소설가로서 어떤 패턴을 갖고 있는 건 아니고, 한 번에 쓸 때 몇 적어도 5~6주 정도 또는 가능하다면 몇 달 정도 좀 이어서 집필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글쓰기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에너지 소모를 하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생각을 하고, 노트를 조금 만든 후에는, 5~6주 정도 한 번에 이어서 글을 쓰고, 또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글쓰기로 돌아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집필이 정체되던 순간은 없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극복하는지) 작가로서의 정체는 없었던 것 같다. 만약에 있었다면 모르고 넘어간 것 같다. 제가 대학에서 학자로서 활동을 했기에 소설가로서 무슨 작품을 써야겠다라고 구상할 시간은 충분했고, 오히려 어려움이 있었다면, 리서치 페이퍼 논문을 어떤 주제로 무엇에 대해 써야 할까라는 고민을 종종 맞닥뜨려야 했다.(웃음)”
노벨상 발표 시즌인 지난해 10월7일, 집에 막 돌아와서 커피를 만들려고 하던 중에 전화기가 울려 퍼졌다. 한림원 관계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얘기했다. 처음 믿기 어려웠다. 텔레마케터의 전화 같기도 했다. 이봐 썩 꺼져, 날 내버려둬.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전화를 끊지 말고 인터넷을 켜서 노벨문학상 수상식 영상을 확인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전화기를 놓고 방에 올라가서 컴퓨터를 켜고 노벨문학상 웹사이트를 살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수상자를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수상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르나는 지난해 스웨덴 한림원에 의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노벨상의 가장 커다란 의미 가운데 하나가 글로벌 이벤트여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라는 작가에 흥미를 갖게 되고 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함으로써 오늘 같이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하는 계기도 마련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변화했다는 게 노벨문학상이 가져다 준 영광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저를 소개하는 것을 굉장히 즐겁게 또 영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결국 잔혹성과 사랑과 나약함이 소설의 주제가 된다’고 했는데.
“당시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굉장히 진실된 글을 쓸 때 삶의 조건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럴 때 잔혹함이라든지 또는 불공정함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따뜻함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또는 친절함에 대해서도 써야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삶 또는 인간성의 양면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을 모두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진실된 것, 사실적인 것에 대해서 쓴다면 이런 글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굉장히 가혹하게 우리 삶에 만연한 불공정함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부당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 이면에 있는 친절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구르나는 1982년 켄트대에서 논문 「서아프리카 소설 비평의 척도(Criteria in the Criticism of West African Fiction)」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3년부터 2017년까지 켄트대 영문학 및 탈식민주의문학 교수로 영어와 탈식민주의 문학을 가르쳤다.
―오랫동안 교수로 살아온 삶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개인적인 삶과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다. 학자이자 교수로서 오랫동안 영국 켄트대에서 교편을 잡아왔다.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소설뿐만 아니라 학술지에도 기고를 하고 각종 학술 컨퍼런스에서 참여하는,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삶을 이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다른 활동을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냐, 균형을 맞추느냐고 물어보는데, 사실 그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저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한 것은 아니고, 학기 중에는 학자 교수로서 일에 전념하고,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소설을 써왔다. 4년 전, 교수직에서 은퇴하면서 소설 쓰기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그 외에도 삶은 굉장히 많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과 기후위기, 팬데믹 등 갈등과 위기가 만연한 지금,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시간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모든 시대와 시간에 적용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인류는 많은 위기, 심각한 위기에 늘 직면해 왔고, 그런 것에 맞서 싸우면서 해결해 나가면서 지금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문학이 왜 중요할까, 라고 자문해본다면 무엇보다 독서라는 행위,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책을 읽는다는 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정보만을 위해서라면 신문이라든지 논문이라든지 다른 서적을 읽을 텐데, 우리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문학책을 집어 든다. 두 번째로는 동시에 문학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인간관계라든지 또는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그것을 더 알아나갈 수 있게 된다. 정리하면 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세상에 팽팽한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된다거나 또는 어떤 신념을 가져야 된다고 이야기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단지 저는 이러이러한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몇해 전 한국에서도 예멘 난민에 대한 혐오가 큰 논란이 됐는데.
“제가 모르는 것이기에 한국 사회에 전반적인 조언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배타성이라든지 또는 외부 문화적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은 모든 사회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우리는 전쟁이라든지 폭력 또는 많은 형태의 결핍에 의한 위협받는 삶을 인류로서 환대 의무를 지고 있다. 어떤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환대하도록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풍요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렇지 못한 사회를 환대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멘 난민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배타성 문제를 거론했는데, 영국 사회도 몇 년을 주기로 대상은 다르지만 외부인 또는 난민에 대한 사회적인 공황에 빠지는 것 같다. 인도 사람들이 됐던, 파키스탄 사람들이 됐던, 혹은 시리아 사람들이 됐던, 대상은 주기적으로 바뀌면서 계속해서 외부인에 대한 패닉이 이어지고 있는 점도 살펴보고 싶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괴물적인 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도발에도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믿기 어렵다. 굉장히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이라든지 폭력이라는 것을 절대 합리화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말씀드릴 수 있다.”
비록 한국 기자들과의 화상 인터뷰는 영국 현지 자택에서 이뤄졌지만, 구르나의 작가적 시선은 과거에서 미래까지 세상 곳곳으로, 우리들 마음 깊숙한 곳에까지 향할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부당함과 함께 인간 자체의 다양한 면모와 감정을 살려내기 위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단순화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르나의 작가적 도전 역시 예상할 수 없는 세상의 굴곡과 삶의 상처 속에 놓인 이들 앞에서 쉼없이 시도될 것이다. 식민주의와 이주를 재검토하면서도 인물들의 가식과 거짓, 전략적 기만을 교차시키면서. 단순한 세상과 평면적 삶을 넘어서 수천수만의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과 사건, 역사들을 교차시키면서. 그리하여 그의 서성이는 눈길은 수백 수천의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수백만 외국인들이 생활하는 한국에까지 미칠 지도. 아니, 그곳에서 서성이는 눈길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눈길을 기록하려는 사람이라면 우린 모두가 구르나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