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에서 해방된 듯 화면을 자유롭게 차지한 사람과 말, 야자수, 새가 관람객을 맞는다. 작품 ‘따스한 섬’(1998)이 입구에서 예고한 대로 전시장 안에는 따뜻한 자유가 넘실거린다. 고향을 그리워하다 어디에나 고향을 만들고 이윽고 고향이 필요없는 사람이 된 화가. 포킴(1917∼2014·김보현) 작품 세계의 세 번째 절정, 가장 원숙한 단계에 도착한 그가 마침내 자유의 붓질을 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학고재에서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뉴욕의 한인화가 포 킴’ 전시가 한창이다. 포킴 말년, 가장 후기 작품인 컬러풀한 대형 구상 회화 작품을 집중 조명한 전시다. 1988년에 완성한 ‘파랑새’를 시작으로 1990년대 회화 4점, 2000년대 회화 13점, 2010년대 회화 5점 등 총 23점 작품을 선보인다.
포킴의 인생은 제국주의사와 전쟁사, 사상사와 미술사가 쉼 없이 만들어낸 거친 파도 위에 힘 없이 떠 있다. 1917년 일제강점기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가난한 야만의 유년을 보냈다. 대구에서 자라고 광주에 정착했다. 해방 후엔 전후 이념대립의 한복판에서 고초를 겪었다.
미군정 시기 광주 주둔 사령관 딸에게 미술 개인지도를 했다가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우익 반동분자로 몰려 전기고문을 당했다. 미군정이 물러나자 여수·순천 사건이 터져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고 잡아갈 때 그 역시 끌려갔다. 조선대 미대 교수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가 공산주의를 가르친다며 국군과 경찰 손에 목포 구치소로 끌려갔다. 6·25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그때 끌려가면서 알았다. 이틀 후 구치소에서 풀려났을 때 목포는 다시 인민군 세상이었다. 그가 살던 자리는 인민군 세상과 국군의 세상을 오갔다.
그는 95세 때 한 인터뷰에서 “항상 경찰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다. 형사들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한국이 무서웠다. 한국에선 항상 소화가 잘 안 돼 약을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공포에 질린 그가 자유를 찾아 떠난 곳은 미국 뉴욕이었다. 300달러를 들고 1년짜리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입국했고 이후 떠나지 않아 불법체류자가 됐다. 낮엔 넥타이 공장에서 시급 1달러를 받고 선을 따라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는 일을 했고 밤엔 그림을 그렸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뉴욕은 생동감 있는 도시였다. 맥박이 뛰는 미술의 중심지였다.” 그의 생전 회상이다.
45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팔았고 전업 화가가 됐다. 파리로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뉴욕에 만개한 자유가 그를 붙잡았다. 세계대전 후 미술의 중심은 미국 뉴욕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조류에 그도 몸을 싣는다. 추상표현주의에 서예의 필체, 동양적 흔적이 담긴 추상화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 첫 번째 절정을 이룬다. 이어 1960년대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등 청과물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드로잉으로 두 번째 절정에 도달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 번째 절정이 이번 전시에서 조명되는 후기 작업이다. 추상과 구상이 어우리지며 완성된, 컬러풀한 지상낙원 세계가 대형 캔버스에 펼쳐진다. 마치 무한한 자유를 꿈꾼 그의 영혼이 비로소 평온을 찾은 듯 보인다.
그는 미술사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해방 후 조선대 미대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친 1세대 스승으로, 남도 화단의 대표 주자 천경자, 오지호 등과 힘을 합해 후학을 길렀다. 뉴욕 정착 후에는 로버트 인디애나, 아그네스 마틴, 야요이 구사마 등 현지에서 활동하던 국제적 작가들과 교류했고, 김환기, 김창열, 남관 등 한국 화가들과도 영향을 주고받았다. 생전 마티스와 고갱을 좋아한다고 밝혔던 그는 사후 20세기 후반 뉴욕 화단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작가로 한국명 김보현, 미국 활동명 포킴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원숙한 노년에 이르러 서양과 동양을 뛰어넘는 자기화의 길, 무한의 자유 세계로 한껏 날갯짓했다. 화면의 파노라마에는 젊은 시절을 억압했던 구속의 삶과 상처 입은 영혼을 이겨내고, 디아스포라의 땅에서 고립과 망향마저 씻어 내려간 포킴의 삶의 승리가 투영되어 있다”고 평했다.
6월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