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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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임금피크제 무효" 판단… 산업현장 혼란·갈등 불가피

“나이만 기준 도입 안돼” 원심 확정
산업현장 재협상·소송 줄이을 듯

도입 목적 정당성·삭감 정도 등
효력 여부 대한 판단기준 제시
불충족 기업, 정년 연장 등 전망
임금채권 소멸 시효 퇴직 후 3년
퇴직자도 임금 청구 소송 나설 듯

경총 “연령 차별 아닌 연령 상생”
한국노총 “당연한 결과… 환영”
서울 서초구 대법원. 뉴시스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을 기준으로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무효라고 판단했다. 법원이 임금피크제의 효력을 인정하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으로, 산업현장에서 임금피크제 적용 조건과 감액률 등을 놓고 노사 재협상 및 임금 청구소송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6일 퇴직자 A씨가 옛 전자부품연구원(현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낸 임금 등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해당 연구원은 생산성 향상 일환으로 2009년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기존 61세 정년은 유지하되 55세 이상 근로자들에 대해서만 성과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했다.

A씨는 2013년 4월부터 다음 해 9월 명예퇴직할 때까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는데, 월 최소 93만원에서 최대 283만원까지 임금이 줄자 연구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A씨는 연구원이 도입한 임금피크제는 현행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의 연령차별 금지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1·2심은 연구원의 임금피크제가 연령차별에 해당한다며 A씨 손을 들어줬고,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연구원의 임금피크제에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봤다. 실적 달성률 등 연령별 업무 성과를 살펴보면 55세 이상 직원들이 51세 이상 55세 미만 직원들보다 우수한데, 임금피크제를 이유로 55세 이상 직원만 임금이 감액됐기 때문이다. 또 임금이 줄었는데도 업무량은 임금피크제 도입 전후로 변화가 없었던 점도 고려됐다.

다만 재판부는 모든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본 것은 아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임금피크제의 효력에 관한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면서도 “현재 다른 기업에서 시행 중인 임금피크제 등의 효력 인정 여부는 도입 목적의 정당성, 실질적 임금 삭감의 폭, 업무량 변화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깎인 임금만큼 업무량 줄여야”… 임금체계 재편 후폭풍 예고

 

대법원이 26일 “합리적 이유가 없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산업현장에서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임금피크제의 효력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했지만, 임금피크제의 ‘적정 수준’은 개별 사업장마다 다르다고 판시해서다. 각 회사의 임금피크제 위법 여부를 확인하려는 근로자들의 소송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령화 추세 속에서 고용 안정을 위해 정년을 보장하는 대신 임금을 삭감하자는 취지로 2000년대에 도입된 임금피크제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전망과 함께 ‘올바른 임금피크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대법원이 제시한 임금피크제 효력 기준은 △도입 목적의 정당성 및 타당성 △실질적 임금삭감 정도 및 기간 △임금삭감에 준하는 업무량 감소 여부 △감액된 재원이 본래 목적으로 사용됐는지 여부 등 4가지로 나뉜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서의 임금피크제는 정년이 고정된 채 업무량 감소 등도 없이 임금만 삭감해 무효 판결이 나온 것”이라며 “타 회사의 임금피크제에 대한 판단은 별도의 종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법조계에선 현재 임금피크제 대상 근로자는 물론이고 퇴직자도 임금 청구 소송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임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임금 채권의 소멸시효는 퇴직 후 3년까지다. 퇴직한 지 3년이 안 된 퇴직자들은 이번 판결을 참고해 과거 재직 중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삭감된 임금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미 1심이나 2심에 계류 중인 관련 소송들에서도 근로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임금 채권이 소멸했더라도 회사로부터 임금에 준하는 합의금을 받아내는 소송도 이어질 수 있다. 근로기준법상 회사의 위법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는 5년이다. 회사를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5년은 안 된 퇴직자는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며 노동청에 전 회사를 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회사는 사법 조치를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퇴직자와 합의에 나서고, 퇴직자는 삭감된 임금 일부를 합의금으로 받은 뒤 신고를 취하해주는 일종의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

 

쟁송은 대기업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날 전망이다. 고용노동부의 ‘2021년 6월 말 기준 사업체노동력조사 부가조사결과’에 따르면 정년제를 운용 중인 34만7422개 업체 중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곳은 전체의 22.0%인 7만6507곳이다. 규모가 ‘300인 이상’인 사업체 경우는 총 3265곳의 절반 이상(53.6%)인 1750곳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공공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제기도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임금피크제는 박근혜정부에서 노동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늘리는 ‘60세 정년’ 의무화에 발맞춰 2015년 말 모든 공공기관에 도입해서다.

 

일선 기업에선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부랴부랴 임금피크제 내용 수정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임금피크제 적용자의 업무강도를 낮춰주거나, 정년을 연장하는 식이 될 전망이다. 익명을 요구한 노무사는 “기업 인사 평가를 하다 보면 나이만을 기준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회사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구직 희망자들이 구인게시판을 살피고 있는 모습. 뉴시스

현장에선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커질 것을 대비해 정부 등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 또는 노사정 합의체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대법원 판단 기준에 맞춰 올바른 임금피크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정부가 국정과제로 선언한 공공기관 직무급제 추진 또한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종혁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은 “임금피크제가 사회 고령화로 연공급 임금 체계를 유지하면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소송이 잇따르면 임금피크제 제도 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라며 “현장에서 임금피크제가 점점 축소되고 연공급제가 한계에 부딪히면 직무급제로의 전환 논의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使 “고용불안 야기” 勞 “제도 폐지돼야”

 

대법원이 연령만을 이유로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경제계와 노동계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노동계는 즉각 환영한 반면, 경제단체들은 ‘일자리 감소’ 등을 이유로 우려를 드러냈다. 기업들은 판결이 회사에 미칠 영향을 따져보면서도 입장 표명을 자제하며 신중한 모습이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6일 입장문을 통해 “임금피크제의 본질과 법의 취지 및 산업계에 미칠 영향 등을 도외시한 판결”이라며 “향후 고령자의 고용 불안을 야기하고,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 감소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또 “임금피크제는 “연령 차별이 아닌 연령 상생을 위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뉴시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논평을 내고 “급속한 고령화에 대응해 고용 안정을 위해 노사 간 합의하에 도입된 임금피크제가 연령에 따른 차별로 위법하다고 판단한 금번 판결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키고 고용 불안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며 “향후 관련 재판에서는 고령사회에서 고령자의 고용 안정과 청년들의 일자리 기회 확대 등 임금피크제가 갖는 순기능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신중한 해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합리적 이유 없는 임금피크제를 무효로 본 대법원 판결을 환영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논평을 내고 “지금 같은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대법원 판결은 당연한 결과로, 적극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법률원장인 정기호 변호사는 “대법원이 자본가들의 퇴로를 만들어줬다”며 “앞으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은 이번 판결의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주시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판결만 보고 기업이 당장 무슨 조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정부의 행정 해석 등 ‘가이드라인’이 나와야 어떻게 대응할지가 정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동수·남혜정·이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