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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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쉼표] 오래 간직해온 물건들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우산을 챙기다가 문득 이 우산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헤아려 보니 그것을 선물받았던 때가 2000년대 초반, 다시 말해 무려 20년이나 되었다는 얘기였다. 세상에. 우산을 손에 들고 접었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손잡이 부분의 플라스틱이 조금 마모되었을 뿐 그것은 외관상으로도 기능상으로도 아무 문제 없이 멀쩡했다.

몇 해 전 어느 문예지에, 버리지 못하고 오래 간직해 온 물건에 대한 산문을 썼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는 난감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잘 사지도 않고 곁에 두지도 않는 내가 쓸데없이 뭔가를 오래 간직해 왔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대학 시절에 쓰던 무선호출기가 아직도 서랍 속에 있다는 것을 우연히 깨닫고는 그것에 대해 썼다. 그때만 해도, 아니, 이제 와 불현듯 우산의 나이를 헤아려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현재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지금껏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해 온 물건은 그 호출기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천만에.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작정하고 찾아보니 내게는 우산을 비롯하여 20년 이상 묵은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내가 즐겨 입었던 초록색 스웨터가 있고 다 쓴 공중전화카드들이 있으며 A면과 B면 가득 비틀스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가 있는가 하면 고등학생 시절 3년 내내 썼던 샤프형 지우개도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고등학생 때 사용했던 독서대였다. 거기에는 당시 친구가 내게 남겼던 한 문장짜리 메모가 그것을 처음 받았던 날 그 상태 그대로 부착되어 있었다. 수성펜의 빛이 바래 마치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메모지처럼 보이지만 나만은 거기 적힌 글씨들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똑똑히 읽어 낼 수 있었다. 눈이 펑펑 오는데 너는 왜 계속 잠만 자니. 내가 그랬었나. 친구가 그렇다고 썼으니 그랬겠지. 어쨌든 그러니까 나는 눈이 펑펑 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자는 고등학생이던 나를 독서대와 함께 오래 간직해 온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물건들은 대부분 플라스틱이었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썩는 데 장장 500년이 걸린다는 전언을 늘 공포와 죄책감과 각성으로만 받아들였는데,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내내 예의 그 옛 물건들을 계속 간직할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고도 다행스러웠다.


김미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