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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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앞치마로 변신… 버려진 현수막에 ‘새 삶’ [밀착취재]

폐현수막 ‘업사이클링’ 현장
폐현수막 업사이클링 기업 ‘녹색발전소’ 작업동에서 직원들이 천과 나무 지지대, 노끈을 분리하고 있다. 직원들 뒤에는 가져온 현수막이 산처럼 쌓여 있다.

화려한 색색의 현수막들이 전국의 거리를 뒤덮었던 지방선거가 끝난 이틀 뒤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폐현수막 업사이클링(자원 재활용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활동) 기업인 사단법인 ‘녹색발전소’를 찾았다. 폐현수막이 가득 쌓인 공장 작업동에선 천과 나무 지지대, 노끈을 분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옆 작업실에선 장바구니와 마대를 만드는 재봉틀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폐현수막 재활용 사업을 하다 보니 처음 할 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1993년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시에서 최연소로 개인택시면허를 받았는데 사회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천 정화 활동 관련 환경운동을 시작했지요. 2004년부터는 폐현수막을 활용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실 처음엔 대충 만들었습니다. 버리는 현수막으로 만든 제품이니 사용하다 금방 버려져도 크게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현수막 질도 좋아졌고 오랫동안 잘 사용할 수 있게끔 진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듭니다.” 녹색발전소의 김순철 대표가 이야기한다.

 

서울 송파구 물품보관소에서 관계자들이 수거해 온 현수막을 내려놓고 있다. 이어서 분리 작업을 한다.
서울 송파구 물품보관소에서 관계자들이 수거해온 현수막을 내려놓고 있다.

“폐현수막을 활용한 제품은 주로 마대, 장바구니, 모래주머니입니다. 마대는 다른 재활용품이나 폐기물 등을 담는 용도로 많이 쓰입니다. 특히 현수막 마대는 자동차 정비공장 같은 산업 현장에서 사용하기 좋은데, 일반 마대와는 달리 기름이 배어 나오지 않아서요. 모래주머니는 구청에서 많이 사용하는 치수용 모래주머니로 제격입니다. 장바구니도 각 기업체에서 재활용품 홍보용으로 많이 제작합니다. 주문을 받아 용도와 크기에 맞춰 제작합니다. 몇 년 전부턴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사용하는 물체주머니로도 만들어 제공하고 있습니다. 버려지는 현수막으로 만든 주머니로 환경교육을 하면 그 이상 좋은 게 없지요. 물론 인체에 무해하다는 검사 결과도 받아뒀습니다. 폐현수막으로 거창한 것들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거창한 거 만들려다 오히려 환경을 힘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도에 맞게 조금이라도 더 활용할 수 있다면 좋은 겁니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거리에서 본 선거운동 현수막들.

지난 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졌다. 공직선거법 제67조에 따라 후보자가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표지를 교부받아 거리에 게시한 선거운동용 현수막은 총 12만8천여매로, 10m 길이의 현수막을 한 줄로 이으면 1281㎞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에서 도쿄까지 갈 수 있는 거리다. 현수막을 모두 펼쳐놓을 경우 128만1260m²로 서울 월드컵경기장(5만8551m²)의 21배, 현수막 1개 무게가 1.5㎏이라 총 무게는 192t에 달한다고 한다. 중앙선관위는 후보자 및 정당선거사무소의 외벽에 걸리는 현수막과 투표 독려 현수막 등도 있어 실제 양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한다고 밝혔다. 거리엔 선거 현수막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현수막이 만들어지고 거리에 내걸리고 떼어지고 버려진다.

 

폐현수막 업사이클링 기업 ‘녹색발전소’의 김순철 대표가 파주시 공장 제작동에서 폐현수막으로 만든 장바구니를 들어 보이고 있다.
녹색발전소 공장 제작동에서 직원들이 폐현수막을 이용해 장바구니와 마대 등을 만들고 있다.
송파구 물품보관소에서 관계자가 만들어놓은 폐현수막 장바구니를 건네고 있다. 폐현수막 재활용품 배부 명단에 기입한 뒤 필요한 만큼 무상으로 가져간다.

서울 송파구 물품보관소에서도 폐현수막을 수거해 재활용하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만들던 직원이 “여기도 하루에 보통 100여장씩 들어옵니다. 폐현수막이 가방도 되고 앞치마도 되고 마대도 되고 우산 커버도 되고 선풍기 커버도 되고 용도가 참 다양합니다”라고 말한다.

 

녹색발전소 공장 제작동 창문 커튼을 현수막으로 만들었다.
나름 작품(?)들을 만들었다. 모델 사진이 들어간 장바구니(왼쪽)과 앞치마.

김 대표는 “지난해까진 사업이 적자였습니다. 딸이 합류해 올해부터는 현상 유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도 활용하고 신세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사업해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있습니다. 일반 현수막과 달리 선거 현수막은 질이 안 좋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가져오는 현수막 중엔 목도리로 써도 될 정도로 질 좋은 실크 현수막도 있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조그만 꿈이라면 한 장의 현수막이라도 태워지지 않고 재활용됐으면 합니다. 환경이 좋아지려면 내 손발이 피곤해야 합니다. 요즘 세상은 모든 게 너무 편리하고 에너지 소비도 많습니다. 사람에겐 좋지만 환경에겐 힘들겠지요. 그냥 버려진다는 게 너무 아깝습니다”라고 말을 맺는다.


사진·글=허정호 선임기자 hoy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