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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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에 집 잃은 야생동물 어디로 갔을까 [지구의 미래]

녹색연합 ‘산불 피해지 탐사’ 르포
산양 200여마리 터전 잃고 뿔뿔이… 인간이 원서식지 복원 도와야

화마에 사라진 야생동물
울진일대 6시간 탐사… 서식흔적 소실
16.9㎞서 야생동물 흔적 겨우 18개 뿐
고라니·노루 등 포유류 큰 피해 예상
기동력 갖춘 산양, 서쪽 이동 가능성

2차 피해 불가피
개체마다 먹이터·은신처 있는데…
이동땐 타개체와 경쟁구도 불가피
싸움에서 지면 도태·아사 등 심각
지리 고려 자연·인공복원 계획을
경남 밀양시 부북면 산불 발생 사흘째인 지난 2일 화재 현장의 산림이 불에 타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연합뉴스

2만4616㏊. 올 들어 화마가 휩쓸고 간 산림 면적이다. 서울시의 40%, 세종시의 절반이나 되는 넓이다.

 

봄철 산불은 해마다 있었지만 올해는 유별나다. 봄철 산불조심기간은 5월15일 끝나지만, 올해는 경남 밀양시에서 지난달 31일 발생한 산불이 지난 5일에야 꺼졌다. 보기 드문 ‘6월 산불’이다. 권춘근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5월로 넘어가면 수목이 생장하며 수분이 늘어 잘 발화하지 않고 산불이 발생해도 잘 확산되지 않는다”며 “국가산불통계 작성 이후 6월 대형산불은 최초”라고 했다. 이번 봄철에 강수량이 기록적으로 적어 토양에 작은 불씨만 떨어져도 큰불로 번지는 탓이다.

 

올해 최악의 산불은 지난 3월4일 발생한 경북 울진 산불이다. 열흘간 산림과 민가 등을 태워 2만여㏊의 면적이 피해를 입었다. 산불 발생 당시 울진 원전과 삼척 액화천연가스(LNG) 생산기지는 모두가 합심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았다. 민가는 재산피해가 불가피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재민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난 3월 4일 경북 울진군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이 초속 25m의 강한 바람을 타고 강원 삼척시 원덕읍 한 마을 뒷산으로 번지며 민가를 위협하고 있다. 삼척=연합뉴스

야생동물은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할까. 대피할까, 주변에 숨을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다 불길에 휩싸일까. 야생동물에게 산불은 집 전체가 타는 일이지만, 우리는 ‘다행히 산림만 탔다’고 쉽게 말한다. 울진 일대에 살던 야생동물들은 숯처럼 새까맣게 탄 집에서 어떻게 됐을까. 지난 5일 이들의 흔적을 따라가 봤다.

 

◆산양 찾아 삼만리

 

울진·삼척은 전 세계에서 최남단에 있는 산양 집단서식지다. 이 지역에 산양이 100마리 이상, 많게는 200마리 안팎의 개체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울진·삼척 부근에 서식하는 산양 보호를 위해 활동해 온 녹색연합은 지난 4∼5일 일반 시민들과 산불피해지 내 산양의 흔적을 좇아 현재 주 서식지를 조사하고 관찰용 무인카메라를 설치하는 등 탐사활동을 벌였다.

 

기자는 탐사단과 함께 울진 소광리 일대를 찾았다. 소광리는 울진종합버스터미널에서 차를 타고도 약 1시간을 구불구불 들어가야 하는 깊은 곳이다. 단단한 발굽을 가진 산양은 험준하고 바위가 많은 환경을 좋아한다. 산양의 흔적을 발견하려면 산양이 주로 살고 좋아할 법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때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인간이 아니라 산양이 돼 보는 것이다. 인간의 길이 아닌, 산양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번듯하고 넓게 닦인 길이 아니라 풀이 많고 몸을 잘 숨길 수 있고 즐겨 탈 만한 바위가 많은 곳으로 능선을 따라 올라야 한다.

 

산길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때로 야생동물이 지나다니는 길이 나 있는 경우도 있다. 보통 흔적이라고 하면 똥이다. 우거진 산림을 오르다 보면 일반 성인 기준으로 어깨에서 얼굴 사이 높이로 뻗은 나뭇가지가 끊임없이 앞길을 막는다. 손으로 시야를 트고 다리로는 낮은 풀이나 가지를 쓸며 걷다 보면, 검은색 바지에는 끈적끈적한 나뭇잎 진이 몸통과 허벅지 부분에 잔뜩 붙어 있다. 숨은 차오르고 눈앞으로 휘어 날아오는 나뭇가지에 언제 얼굴을 긁힐지 모르겠고 시야를 트는 데 집중하다가 나무 밑동에 종아리를 박으며 점점 산양같이 사족보행에 가깝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평지에 가까운 능선에 다다른다. 이때 산양 배설물을 만나는 반가움이란. 산양도 굳이 힘들게 가파른 경사지에서 변을 보지는 않는다. 이날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 중 하나는 “똥이라도 발견해야 쉴 수 있다” “똥이 반갑다”였다.

울진 소광리 일대 야산에서 발견된 길쭉한 커피콩처럼 생긴 산양 배설물.

산에는 오소리, 삵, 담비 등 여러 야생동물의 배설물이 남아 있지만, 특히 개체 수가 많은 고라니 배설물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라니 배설물은 검은 콩처럼 동그랗게 생겼다. 산양 배설물은 그보다 길쭉하다. 낙엽이나 낮은 풀 사이로 원통형의 검은 배설물이 후두둑 떨어져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힘들게 산을 오른다한들 산양 배설물을 마주쳐도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느새 ‘어, 산양 똥이다’라고 말할 만큼 식별이 쉽다.

 

5일 새벽 5시30분에 산으로 출발해 오전 11시30분쯤 점심 전에 산행을 마칠 때까지 약 6시간 동안 16.9㎞를 걸으며 발견한 야생동물 흔적은 총 18개. 이번 탐사에 함께한 박성준 녹색연합 활동가는 “산불 나기 전에는 한 번 산행에 산양, 멧돼지, 고라니, 삵, 담비 흔적을 20개 이상씩 발견했다”고 전했다.

◆산양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산불로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이 폐사했고 피해를 입었는지는 정확히 집계하기 어렵다. 이번 울진 산불로 전소돼 피해가 막심한 지역은 해안가에 집중됐다. 근처 산림에 살던 고라니, 노루, 너구리, 오소리 등 중대형 포유동물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예상만 가능하다.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기동력이 떨어지는 하늘다람쥐 같은 종은 불똥이 튀어 나무로 옮겨붙는 비화로 산불이 악화되면 직접적으로 폐사할 위험이 높다.

 

바위, 암반 지대에 특화돼 상대적으로 내륙에 사는 산양 서식지까지도 불길은 닿았다. 다만 지표면만 타는 지표화가 군데군데 발생해 폐사체가 발견되지는 않았고 대부분 불길을 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양은 보통 시속 40∼50㎞로 달릴 수 있는 기동력을 갖췄다. 박 활동가는 “피해지역 중 4500㏊ 정도는 산양 서식지로 파악된다”며 “불이 동쪽 해안에서 서쪽으로 확산돼 산양은 더 서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2014년 녹색연합의 야생동물 조사용 무인카메라에 촬영된 산양 모습. 녹색연합 제공

새 터전을 찾아 이동한 산양은 잘 살까. 산양뿐 아니라 산불을 피해 도망간 야생동물의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우동걸 국립생태원 멸종위기종복원센터 박사는 “원래 동물은 행동권이라고 해서 개체마다 필요로 하는 먹이터와 은신처와 잠자는 곳이 갖춰진 일정 공간이 있다”며 “행동권이 형성된 상태에서 산불 등 교란행위로 외부에 가면 이미 그 지역을 점유한 다른 개체가 있어 서식지를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교란이 지나가고 원 서식지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우 박사는 “새로운 지역에 가면 또 경쟁하고, 경쟁에서 지면 계속 밀려나다가 도태되고 아사하거나 다른 개체의 공격을 받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한다”고 했다. 불길을 피했어도 새 서식지에서 또다시 목숨을 건 ‘생존 경쟁 시즌2’를 벌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 박사는 “야생동물이 받는 영향을 파악하려면 산불 피해지역만 보지 말고 주변까지 광범위하게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에 따르면 인구밀도처럼 어느 면적에 밀집된 야생동물의 정도를 ‘서식압’이라고 표현한다. 서식압이 높아지면 서식지와 먹이를 놓고 경쟁관계가 심화해 약한 개체는 쉽게 도태되는 더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박 활동가는 “서식지가 더 부족해져 좁게 살고 있는 야생동물이 기존 서식지로 돌아오게 복원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 집 리모델링에 의사권 없는 야생동물

 

전소된 지역은 나무가 새까만 가지만 남긴 채 앙상하게 탔다. 그런데 땅에서는 벌써 푸릇하게 풀이 돋아나고 아카시아 꽃까지 피기 시작했다. 자연에서 나름의 복원과 치유가 이미 진행 중인 셈이다. 이렇게 산림이 초지로 변하면 같은 포유류라도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우 박사는 “담비나 청설모 같은 울창한 산림에서 서식하는 종은 서식여건이 나빠지고 풀이 돋아나니 고라니나 멧토끼 같은 초식동물은 먹이 조건이 일시적으로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적절하고 전략적인 복원법이 자연생태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 생물다양성을 높인다는 관점에서는 자연에 그대로 맡기는 자연복원이 유리하지만, 산림의 경제성이나 토양 침식 정도, 산사태 위험도 등을 따져 인공복원도 필요할 수 있다. 박 활동가는 “복원 방식을 논할 때 주로 나무를 어디에, 어떻게, 어느 수종을 심을지 우선 논의한다”며 “복원 사업을 진행하며 나무를 다 베고 새로 심는 과정에서 야생동물은 늘 후순위”라고 지적했다. 그는 “보호구역이나 민가 근처 산지 등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자연복원과 인공복원이 잘 짜여야 한다”며 “자연과 인공의 비율은 7대 3 정도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울진 일대는 산림이 우거지고 다른 지역보다 개발사업과 훼손이 적어 산양 외에도 사향노루같은 멸종위기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보면, 산양은 북한부터 러시아 연해주까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북부와 비무장지대(DMZ), 설악산 일대, 양구·화천, 울진·삼척 네 곳이 주요 서식지다. 이 중 울진·삼척 지역만 국립공원이나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아 특별한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울진군에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멸종위기종복원센터 산하 산양공존센터(가칭)를 만들고 이제라도 산양 관리에 더 힘쓸 계획이다.

 

개체 수 전수조사는 야생동물 관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우 박사는 “지난해 고정조사구를 설치해 전수조사를 진행했는데 산불이 나 올해까지 연장해 추가 조사 중”이라며 “공교롭게 산불 전 데이터를 취득해 올해 조사를 산불 이후 개체 수나 서식지 밀도 차이를 의도하지 않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했다. 내년 초면 분석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예상했다.


울진=박유빈 기자 y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