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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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마음 어루만지는 통영 만지도·연대도 힐링 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쪽빛 바다·하늘···‘우리들의 블루’/천혜의 비경 통영의 작은 섬 속으로/22가구 사는 만지도 문패마다 섬사람 이야기/출렁다리 건너 연대도로/해송 숲길 지나 만난 몽돌해변서 잠시 쉼

통영 연대도 몽돌해변

솜씨 좋은 화가 작품인가 보다. 파스텔톤 살구색 담벼락에 농도를 달리하는 푸른 파도가 엠보싱처럼 올록볼록 예쁘게 담겼다. 그리고 담 밑에 적힌 할머니 사연 하나. 90 평생 섬에 살면서 7남매를 키워 냈고 여전히 젊은이들보다 ‘바다 달팽이’ 군소를 빨리 찾아낸단다. 매일 선착장에 앉아 언제나 살짝 웃는 얼굴로 여행자를 반갑게 맞던 임인아 할머니. 3∼4년 전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없지만 섬사람들이 들려주는 할머니 옛이야기는 여전히 경남 통영의 작은 섬, 만지도(晩地島) 골목 따라 정겹게 흐른다.

만지도(오른쪽)와 연대도 전경
만지도 선착장

#지친 마음 포근하게 어루만져 주는 만지도

 

통영시 산양읍 연명항을 떠난 ‘홍해랑 5호’가 보석을 쏟아부은 듯한 쪽빛 바다를 하얀 포말로 가르며 달린다. 수평선을 따라 붓으로 무심코 꾹꾹 누른 듯, 섬들이 아스라이 흩어지고 겹쳐진 신비한 풍경이라니.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로 부르지만 몇 해 전 가 본 나폴리 저리 가라다. 이곳을 왜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 부르는지 실제 보니 잘 알겠다.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버리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다 보면 배는 15분 만에 만지도에 닿는다.

 

주변 섬보다 주민이 더디게 정착해 만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요즘은 지치고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섬이어서 만지도로 불린다는 얘기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밤새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부채질로 손주를 재우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풍경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만지도 선착장 물긷는 펌프
만지도 선착장 포토존

선착장에 도착하면 우물가 빨간 펌프가 여행자를 반긴다. 60대 아주머니가 “어릴 적 외가 마당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리던 기억이 난다”며 마중물을 붓더니 열심히 펌프질을 해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100년 넘은 우물과 물이 나오는 곳이 3∼4곳 있을 정도로 만지도는 지하수가 풍부하다. 주변의 학림도, 연대도 사람들도 배를 타고 이곳으로 빨래하러 왔을 정도. 벤치가 놓인 ‘만지도 명품마을’ 포토존에서 인증샷 하나 남기고 섬 여행을 시작한다.

임인아댁
임인아댁

동서로 1.3㎞ 길게 누운 작은 섬은 22가구 30명 정도가 살 정도로 아주 작다. 가장 높은 만지봉에 오른 뒤 해안산책로를 따라가는 만지도옛길 ‘몬당길’을 한 바퀴 모두 둘러봐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가장 처음 만나는 섬 이야기가 임 할머니 사연. ‘만지길 5’ 주소 밑에 ‘문어와 군소를 잘 잡는 만지도 최고령 할머니 임인아 댁’이라 적혔다. 해산물이 풍부한 만지도는 예로부터 돈이 되는 섬이란 뜻의 ‘돈 섬’으로 불려 육지 처녀가 시집을 많이 왔단다. 할머니도 통영시 산양읍 미남리 척포에서 시집와 평생을 만지도에서 살며 억척스럽게 일해 7남매를 키워 냈다. 반쯤 열린 대문 틈으로 펼쳐진 아담한 단층집 풍경이 고향마을에 온 듯 정겹다. 아흔이 넘어서도 군소를 잘 잡던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에는 아들이 집을 지키고 있다. 

천지펜션

만지도 집 문패마다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할머니 옆집은 ‘전복 생산자의 집’. 만지도에서 직접 기른 전복만 판매한단다. 만지봉으로 오르는 골목 입구 문어가 그려진 천지펜션은 섬마을 할매 이만기씨 집으로 ‘우리나라 최초 3관왕 카누선수 천인식 선수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란 상세한 설명이 달렸다.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파트에 사는 도시 사람들에게는 좀 부러운 문패다. 내 집 아파트 현관문에도 저런 문패 하나 단다면 어떤 내용을 적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언덕길을 오른다.

만지도 바람길전망대
만지도 바람길 전망대

이정표에서 왼쪽 출렁다리 쪽으로 걸으면 등장하는 견우직녀터널을 지나 바람길 전망대에 섰다. 만지도 최고의 풍경 맛집답게 왼쪽부터 소지도, 내부지도, 연화도, 우도, 욕지도, 쑥섬, 노대도, 두미도가 점처럼 박힌 그림 같은 모습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면서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 준다. 이정표에서 만지봉 방면으로 접어들면 만지분교가 등장한다. 1965년 마을회관에서 시작한 조양국민학교 만지분실이 2년 뒤 만지분교로 인가받자 주민들이 땅을 기부하고 건축 자재를 직접 날라 학교를 지었다. 학생 116명을 배출했지만 젊은이들이 모두 뭍으로 떠나면서 1997년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됐다. 방치된 건물과 치마저고리를 입은 학생들의 빛바랜 흑백사진만 덩그마니 남아 옛 추억을 전한다.

만지도 몬당길
만지도 몬당길 수달 조형물
연대도 전경

만지봉 오르는 길에서는 만지도와 연대도의 해안 절벽이 어우러지는 절경이 기다린다. 몬당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200년 해송전망대, 할배바위, 구렁이바위가 차례로 등장하다 화가 이중섭이 사랑한 욕지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들머리 전망대에서 절정을 이룬다. 해안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놓인 귀여운 수달 조형물을 만나면 만지도 여행을 완성한다.

만지도와 연대도 해안 풍경
연대도-만지도 출렁다리
연대도-만지도 출렁다리

#출렁다리 넘어 연대도엔 몽돌해변 비경

 

만지도 여행은 충분한 여유가 필요하다. 보통 출렁다리로 연결된 이웃섬 연대도를 함께 묶어 여행하는데 두 섬을 모두 둘러보려면 넉넉하게 4시간 정도 필요하다. 특히 연대도의 해안 절경이 뛰어나 오랫동안 발길이 붙잡히니 단단히 각오하고 나서길.

 

풍란과 돈나무가 펼쳐지는 해안데크 풍란향기길을 10여분 걸으면 저 멀리 연대도로 이어지는 출렁다리가 아찔하게 바다 위에 떠 있다. 아주 많이 출렁거리는데 중간쯤에서 저절로 멈추게 된다. 기암괴석이 펼쳐지는 연대도 해안 절벽과 푸른 바다, 바로 앞의 섬 내부지도가 어우러지는 절경 때문에 발을 뗄 수가 없다. 하지만 연대도 절경은 이제 시작이다.

연대도-만지도 출렁다리
연대도에서 본 만지도와 출렁다리 전경
연대도 해송숲길

다리 끝에서 해송길이 시작되며 입구 오른쪽이 포토 스폿. 해송 사이로 만지도와 출렁다리 전경이 펼쳐져 바위에 앉으면 근사한 사진을 얻는다. 어른 몸통 두 배가 넘는 굵기의 해송들이 마치 작품처럼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면 드디어 숨겨진 연대도의 비경을 만난다. 좌우에 높은 절벽을 거느리고 활처럼 휘어진 몽돌해변과 수평선을 꾸미는 많은 섬. 특히 내부지도는 다리에서 본 것보다 손에 잡힐 듯 훨씬 더 가깝다. 알록달록한 몽돌에 누워 눈을 감는다.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몽돌 소리와 파도 소리에 스르르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연대도 넓은 몽돌해변
연대도 몽돌해변 협곡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몽돌해변이 끝나는 곳에 작은 협곡이 보인다. 오랜 지각활동은 기암괴석 절벽과 그 사이로 넘실대는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비경을 만들어 놓았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또 다른 숨겨진 몽돌해변과 그 너머로 연대도·만지도의 해안선이 하나의 섬처럼 이어지는 풍경이 등장한다. 작은 몽돌해변으로 직접 이어지는 길이 없어 다시 돌아 나와 반대쪽 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 폭은 좁지만 해송이 자라는 수직 절벽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몽돌해변이 연인들에게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선사한다.

연대도 작은 몽돌해변
연대도 작은 몽돌해변

몽돌해변에서 동쪽 숲을 연결하는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4구간 ‘연대도 지겟길’이 시작된다. 북바위전망대∼옹달샘∼오곡도전망대를 지나는 길은 예전 마을 주민이 지게를 지고 마을 산 정상 연대봉까지 오르던 길로 호젓한 숲길이 2.2㎞가량 이어진다. 삼도수군통제영 시절 섬 정상에서 봉화를 올리면서 ‘연대도’(烟臺島)란 섬 이름을 얻었다. 연대도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개양귀비가 화려하게 핀 다랭이꽃밭을 만난다. 해마다 꽃을 심어 꽃밭이 늘고 있으며 수레국화, 감국, 백일홍, 노랑꽃창포, 분꽃 등이 심겨 있다.

연대도 다랭이꽃밭 개양귀비
연대도 지겟길

미륵도 남단의 달아선착장에서 연대도로 직접 들어가는 배편도 있다. 주로 주민들이 이용하는 40명 정원 정기선 섬나들이호가 하루 네 편 운항하며 학림도∼송도∼저도∼연대도∼만지도 순으로 손님을 내린다. 부정기선 16호 진영호는 80명 정원으로 현재 8명 이상이면 출항한다. 연대도까지 직항하면 15분 정도 걸리며 손님이 원할 경우 학림도, 저도에서도 내려 준다.

한려생태탐방원 저녁 노을

섬 두 곳을 모두 여행하고 나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해 연명항에서 차로 5분 거리의 국립공원공단 한려해상생태탐방원으로 달려간다. 커튼을 열면 바다가 코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숙소를 아주 착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요즘엔 ‘노을 맛집’으로 입소문을 탔다. 바로 앞의 쑥섬, 곤리도, 추도가 포개지는 풍경과, 오른쪽 미륵도 여수지봉 사이로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태양은 장엄한 한 편의 대서사시를 완성한다. 


통영=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