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명실상부한 ‘부동산 공화국’이다. 세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대다수 국민이 부동산 투자로 ‘대박’을 노리는 환경에 내몰려 있다. 부동산 소유로 얻는 소득이 다른 투자를 통해 얻는 이익보다 불균형적으로 크다. 사는 곳에 따라 급을 나누는 ‘신(新)주거계급도’, 극심한 자산 격차, 세습 자본주의 등의 탄생은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안겼지만 ‘내 집 마련’과 부동산 투자 성공에 대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동산 공화국의 폭주 속에서 저소득층 주거지 슬럼화 등에 따른 계층 양극화를 완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것이 ‘소셜믹스’(사회적 혼합)다. 한 단지에 자산 수준과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설계하는 정책이다. 올해로 시행 20년을 맞았다. 소셜믹스는 임대가구에 대한 차별·배제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는 한편, 토지·주택의 공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큰 틀에서는 발전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셜믹스 정책이 이룬 성과와 한계를 수시로 고찰하는 것은 부동산 공화국의 색채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절차다.
집이 곧 정체성인 사회에서 일반 분양과 임대 가구를 ‘티 나게’ 섞어놓은 초기 소셜믹스는 더 심한 차별과 갈등을 부른 무심한 설계로 지적받기도 했다. 이후 외관 구분짓기 관행을 없애고, 동·호수 구분 없는 ‘랜덤믹스’ 형태로 익명성을 강화하고 커뮤니티 시설도 이용 가능하도록 개선하는 추세다. 취재진이 비교적 최근 입주한 서울 시내 소셜믹스 단지 약 10곳을 살펴본 결과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갈등 요소는 크게 줄어들었다.
◆구분짓기 관행 없애보니… “편견 크게 개선”
지난해 6월 입주한 서울 서초구의 A아파트는 분양가구와 임대가구의 동·호수를 동시추첨을 통해 확정했다. 단지 관계자는 “옆집이 어떤 집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헬스장, 사우나, 스카이라운지 등도 모두 같은 요금을 내고 이용한다”고 말했다. 2020년 입주한 강동구 고덕아르테온 아파트도 전체 4066가구 중 108가구인 임대가구가 불규칙적으로 분산돼 이웃들과 관리사무소에서 구분할 수 없는 구조다.
랜덤믹스 방식의 혼합단지인 B 아파트에 사는 한 임대가구 거주자는 “살면서 입주자 간 임대가구를 의식하는 분위기는 느껴본 적 없다”며 “동·호수가 섞여서 선입견이 사라지니 사람들이 다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양가구 거주자 이모씨도 “요즘은 사는 곳을 구분하려 드는 게 오히려 교양 없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어 티 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2003년 소셜믹스를 처음 시작한 서울시는 혼합단지를 가장 잘 정착시켜 왔다.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며 조직한 주택정책실 산하 공공임대주택 태스크포스(TF)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임대주택 차별 요소를 개선하고, 사회적 낙인을 깨기 위한 임대주택 고급화 등을 시작했다. 시 관계자는 “나홀로동, 임대라인, 임대층 구분짓기 등을 막기 위해 아파트를 짓기 전 단계부터 개선 작업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으로 동대문구의 C 아파트는 당초 220가구 임대물량을 전부 45㎡의 작은 평형에만 배치했는데 시가 개입해 45㎡ 50가구, 59㎡ 48가구, 69㎡ 35가구, 79㎡ 30가구로 조정하도록 했다. 여러 평형을 확보해 공공임대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다양한 이들이 입주하도록 한 것이다. 강남구의 D 아파트는 공공임대물량 일부가 동북향, 복도식으로 배치돼 통풍과 일조 문제의 차별이 우려되자 시가 평면을 조정해 환기가 가능한 구역을 만들고, 채광 방향을 동향으로 조정하도록 개선했다.
공공임대의 진화를 긍정적으로 보며 주거사다리로서의 기능에 주목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청년 세대에서 소셜믹스 수용력이 높은 것은 고정관념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임대주택을 평생 살 곳이 아닌 더 나은 발판 마련을 위해 거쳐가는 곳으로 삼는 경향 때문이다. LH토지주택연구원 최민아 박사는 “소셜믹스는 주거 비용이 오를 대로 오른 도심에 거처를 마련하기 힘든 이들에게 살 공간을 제공하고, 안정적으로 삶을 계획하게 한다”며 “여러 사회적 비용이 아껴져 결국 모든 계층에게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동등한 의사결정 참여는 ‘미흡’
여전히 소셜믹스 단지 곳곳에서 부동산 공화국의 그늘이 포착되기도 한다. 공공임대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누가 뭐라든 당당히 살면 된다”고 하면서도 “단, 학령기 자녀가 있다면 (혼합단지 입주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견해가 대세다. 같은 단지에 살더라도 소유권자와 임차인이 누리는 환경이 달라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 크고 작은 차별 요소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취재 결과 임대동 건물만 실외기실 루버창을 미설치한 사례, 임대동 한 곳만 다른 동들과 통행이 불편하게 배치된 사례, 차량 차단기에 임대 여부가 표시되도록 한 사례 등이 있었다.
고덕·강일지구의 혼합단지 3곳은 최근 입주한 곳임에도 모두 임차인대표회의가 구성돼 있지 않다. 강동구 E 아파트는 전체 1239가구 중 임대가구(597)와 분양가구(642)가 거의 반반이지만 지속적인 공고에도 나서는 가구가 없는 상태다. 이곳은 라인으로 임대가구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는 단지이기도 하다. 이 아파트 관계자는 “분양가구와 임대가구의 상황과 입장이 같을 수 없다”며 “특히 우리처럼 수가 비슷할 경우 점점 분쟁이 생길 텐데 몇 년만 지나면 문제가 계속 나올 것”이라 우려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임대주택, 임차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입주자대표회의를 막기 위해 ‘혼합주택단지입주자대표회의’를 만들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사회적 합의와 법 개정 방향은 모든 사람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며 “소유주만 의사 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밝혔다. 분양가구가 지불한 금액이 훨씬 더 크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분양가구는 이미 부동산 소유에 따른 자산 이득을 취하고 있다”며 “재산권 관련이 아닌 거주공간에 대한 결정은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발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