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행정 권력과 의회 권력의 싸움이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 등 큰 선거를 앞두고도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이들의 싸움이지만, 그러려니 할 수가 없다. 요즘 정치인들의 목불인견 행태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자타공인 정치 9단이 힌트를 줬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최근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사상 초유로 쉽게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평가했다. 검찰총장을 사임하고, 야당의 후보로 나서 대권까지 1년 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결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전임자의 원치 않은 후광 덕분이었다면 심한 표현일까. 정치 9단의 시선은 더불어민주당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2004년 ‘탄돌이’ 의원들처럼 지금의 여의도 사람들은 촛불과 코로나19 후광으로 2020년 의사당에 쉽게 입성했다.
향후 대선이나 총선과 관련해서는 탄돌이 유형의 모델이 있어서는 안 된다. 풍찬노숙은 고사하고, 세상 어려운 줄 모르는 정치인들이 넘치는 현실은 국민에게는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있다. 적어도 우리 정치사에서 유권자들은 같은 유형의 후보를 연이어 대권 권좌에 올린 적이 없다. 초대 이승만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역대 통치권자들의 이력과 대권 획득 과정은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이었다.
며칠 뒤면 전국 곳곳에서 기초·광역 단체장과 의원들이 임기를 시작한다. 지난해 보궐선거를 통해 재등장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새벽 개표에서야 역전에 성공한 김동연 경기지사 당선자, 더불어민주당 몰락 속에서 살아남은 오영훈 제주지사 당선자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몇 번의 좌절을 겪었던 오세훈을 포함해 모두 어렵게 당선된 사람이다. 오세훈은 스스로 퇴각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수도 서울의 전무후무한 직선 4선 시장으로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김동연은 문재인정부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상황에서 중도·개혁을 기치로 내걸어 도백의 자리에 올랐다. 오영훈은 ‘명낙대전’ 속에서 4·3특별법 제정 주도자라는 성과를 바탕으로 거의 20년 만에 민주당 계열의 제주도지사로 활동하게 된다.
이들의 미래는 좀더 새로워야 하지만, 중앙정치와 상대 측의 견제가 이어질 게 뻔한 상황이기는 하다. 당장 여권에서는 대권 주자인 오세훈에 대한 윤핵관의 견제, 김동연·오영훈에 대한 비협조를 예상할 수 있다. 세 사람 모두 빨간 옷과 파란 유니폼을 벗어던지기 바란다. 선거의 계절에 소수파로 전락할 것 같으면, 자신들의 소속 정당 유니폼의 부각을 꺼리곤 하던 정치인들의 모습을 이들 단체장이 재임하면서 보여줘야 한다. 그것도 수시로.
어렵게 하나씩 풀어나가보자. 오세훈과 김동연은 당 밖의 자산을 활용해 서울·경기의 지방정부 성공을 위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 두 사람은 상견례 수준을 넘어선 경계 밖 협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오영훈은 제주도지사 선배인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허심탄회하게 제주와 국토 발전을 논의할 수 있다. 오세훈과 오영훈 ‘오·오 단체장’에게도 교감을 확대할 분야가 넘친다. 코로나19 이후 관광·여행 시장 확대를 위해 서울과 제주의 상생협력 방안을 찾고, 지역을 세계에 알리는 리더십을 선보이자. 지역에 대한 관심, 중도·실용에 의미를 둔 행보를 펼쳐 온 이들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수도시장 오세훈 중심으로 협치를 이뤄낸다면 4년 뒤 임기 재연장을 지역민에게 호소할 수 있고, 어쩌면 5년 뒤 중앙무대에서 진검승부를 할 기회를 포착할 여지도 있다. 단체장들의 경계를 뛰어넘는 협치와 혁신은 중앙정치의 암울한 상황과 비교될 것이다. 내로남불, 편가르기라는 단어들이 최소한 행정영역에서 사라진다면 이들 단체장과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시인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육첩방(일본)은 남의 나라”라며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민하며 자책했다. 그런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윤동주는 평생을 고민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윤동주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