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가 결국 현실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약 24년 만에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대로 올라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상기후 등 대외 악재에서 비롯된 석유류, 농축수산물 가격 상승세가 개인서비스 등 다른 품목의 가격도 끌어올리면서 전방위적으로 물가가 치솟았다. 물가가 오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조만간 물가상승률이 7∼8%대를 찍을 것이란 우울한 전망도 현실화하는 분위기다. 기록적인 물가 상승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는 13일 한국은행이 ‘빅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할 경우 대출자들의 이자 비용이 불어나 실질소득 감소에 허덕이는 서민층의 부담이 한층 가중된다.
5일 통계청에 따르면 6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08.22(2020=100)로 전년 동월 대비 6.0%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이 6%대를 찍은 건 1998년 11월(6.8%) 이후 23년7개월 만이다.
물가 상승세는 석유류 등 공업제품과 개인서비스가 견인했다. 품목별로는 러시아산 원유 수출가격 상한제 도입 가능성 등의 영향으로 석유류가 전년 대비 39.6% 오르는 등 공업제품이 9.3% 상승했다. 농축수산물은 농산물 가격이 5개월 만에 상승세로 전환되면서 4.8% 올랐다. 석유류와 농축수산물의 물가기여도는 각각 1.74%포인트, 0.42%포인트를 기록, 공급 측 요인에 따른 물가 불안이 확대됐다.
국제 원자재·곡물 가격 상승으로 원재료비가 오르면서 개인서비스 물가(5.8%)도 전월(5.1%) 대비 오름폭을 키웠다. 여기에 근원물가(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 상승률(4.4%)도 2009년 3월(4.5%)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물가의 기조적 흐름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불붙은 물가 상승 속도를 감안하면 조만간 물가상승률이 7∼8%대까지 오를 가능성도 있다. 당장 이달부터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이 올랐고, 내달에는 예년보다 이른 추석과 휴가철의 영향으로 수요가 늘어나는 등 물가 자극 요인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0월(3.2%) 3%대로 올라선 뒤 지난 3월(4.1%)과 4월(4.8%)에 4%대를 기록했다.
이후 5월 5.4%로 오른 뒤 지난달 단숨에 6%대로 상승했다. 어운선 통계청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은 물가가 7∼8%대까지 오를 가능성에 대해 “지금처럼 높은 상승폭을 유지하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도 이날 “우크라이나 사태의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에 따른 국제 에너지·곡물가 상승 영향으로 당분간 어려운 물가 여건이 지속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용산 청사에서 주재한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지금 경제가 매우 어렵다”며 “제가 직접 민생 현안을 챙기면서 현장에 나가 국민의 어려움을 듣고 매주 비상경제 민생회의를 주재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공급망 재편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겹치면서 전 세계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가장 심각한 물가 충격을 받고 있다”며 “민생의 어려움을 줄이는 데에 공공부문이 솔선하고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기관이) 불요불급한 자산을 매각하고 과감한 지출구조 조정과 경영 효율화로 허리띠를 졸라맬 것”이라며 “그렇게 해서 마련된 재원을 더 어렵고 힘든 분에게 두텁게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바구니 물가 이미 7.4%↑… 공공料인상·휴가철 겹쳐 고통가중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대에 진입하면서 서민 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특히 구입 빈도가 높은 필수 품목으로 구성된 생활물가지수가 7%를 훌쩍 넘기면서 취약계층의 씀씀이는 더욱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물가가 오르는 국면에서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취약계층 지원 등을 위한 추가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5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생활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7.4%에 오르며 지난 1998년 11월(10.4%) 이후 가장 높은 상승폭을 기록했다. 생활물가지수는 전체 458개 품목 중 구입 빈도와 지출 비중이 높아 국민들이 가격 변동을 민감하게 느끼는 144개 품목으로 작성된 지수로, 체감물가와 직결된다.
농축수산물은 축산물(10.3%)과 채소류(6.0%)를 중심으로 4.8% 오르며 지난 5월(4.2%)보다 오름폭이 커졌다. 감자(37.8%), 배추(35.5%), 포도(31.4%), 수입 쇠고기(27.2%), 닭고기(20.1%), 돼지고기(18.6%) 등의 상승률이 높았다. 지난 4∼5월 전기·가스요금이 인상됨에 따라 전기·가스·수도도 1년 전과 비교해 9.6% 올랐다.
외식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개인서비스 중 외식 상승률은 8.0%로 1992년 10월(8.8%) 이후 29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로 외식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원자재 가격과 운영경비가 상승한 데 따른 것이다. 생선회(외식)와 치킨은 각각 10.4%, 11.0% 상승했다.
더 큰 문제는 하반기에도 이런 물가 상승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당장 이달부터 전기요금은 4인 가구 기준 평균 월 1535원, 가스요금은 가구당 월 2220원 올랐다. 오는 10월 전기요금의 기준연료비가 kWh당 4.9원, 가스요금 정산단가가 2.30원으로 인상될 예정이다. 전기·가스요금 자체가 전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지만 공공요금은 모든 상품·서비스의 원재료인 만큼 전반적으로 물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음달 휴가철이 정점을 지나는 가운데 예년보다 이른 추석(오는 9월10일)을 앞두고 성수품 소비 증가가 예상되는 등 수요 측 압력도 커지고 있다. 장마·폭염으로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심상치 않은 환율 상승세도 물가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00.3원으로 마감, 올해 2번째로 1300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은 이날 이환석 부총재보 주재로 물가 상황 점검회의를 개최한 뒤 소비자물가가 당분간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은이 한번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하는 ‘빅스텝’을 단행할 수 있다는 전망도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물가가 서민 경제 위기로 전이되지 않도록 정부가 다각도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본적으로는 유동성 회수를 위한 금리 인상은 불가피하다”면서 “전기요금 등이 더 오르기 때문에 (물가 상승에) 추가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따로 지원을 하고, 기업의 비용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올해 (부가가치세율을) 2% 정도 낮추고, 내년에도 물가가 안 잡히면 추가로 인하하되 물가가 잡히면 원상태로 정상화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농림축산식품부는 국내 제분업체를 대상으로 밀 수입가격 상승분의 70%를 한시적으로 지원하는 ‘밀가루 가격 안정 지원사업’을 시행하기로 했다. 농식품부는 올해 하반기 밀가루 출하 가격을 동결하거나 밀 수입가격 상승분의 10% 범위 내에서 밀가루 가격을 인상한 제분업체에 대해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1주택 종부세 기준 ‘11억→14억’ 법개정 추진
국민의힘은 1가구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 과세 기준을 현행 11억원에서 한시적으로 14억원까지 올리는 내용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르면 올해 부과될 종부세 기준에 적용될 전망이다.
국민의힘 물가 및 민생안정 특별위원회는 5일 국회에서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물가 급등기 대책의 일환으로 이 같은 내용의 부동산 정책 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이사 등의 사유로 일시적 1가구 2주택자가 되거나, 상속주택 또는 3억원 이하 지방 저가주택을 추가로 보유해 1가구 1주택자 요건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경우에도 종부세 과세 때 1주택자로 인정하는 내용의 종부세법 개정도 추진한다.
물가특위 위원장인 류성걸 의원은 “새 정부의 부동산 세제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과 종부세 일부개정법률안을 특위 차원에서 발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류 위원장은 기자들에게 “오는 11월 말에 종부세 고지서가 나가고, 12월 1일부터 납부해야 하므로 (법 개정을) 빨리해야 한다”며 “과세 대상은 이미 6월 1일에 결정됐고, 과표가 얼마고 공제가 얼마일지가 굉장히 중요하고 이제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종부세법 개정안에는 1주택자인 고령자(만 60세 이상)와 장기보유자(5년 이상)의 종부세 납부를 유예하는 내용도 포함된다.
특위는 일반 임차인 지원 관련 월세 세액공제를 현행 10∼12%에서 12∼15%로 확대하고, 전세보증금 원리금 상환액 소득공제도 현행 300만원에서 400만원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날 물가특위는 ‘부동산 정책 정상화’ 방안과 ‘임대차 시장 동향 및 대응 방안’도 집중 논의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동산 태스크포스(TF) 팀장이었던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물가 급등기의 부동산 정책 정상화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심 교수는 통화에서 “지난 정부에서 양도세와 보유세, 분양가상한제, 전·월세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 등을 통한 부동산 안정과 세입자 보호를 주장했지만, 그 부작용들이 상당수 나타났다” “새 정부는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