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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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료 2배 내라” 갑질에… 쪽방촌 ‘잔인한 여름’

폭염 속 과다 요금 부담 이중고

여러 가구가 계량기 하나로 공유
집주인 고지서 받아 가구당 정산

전기사용량 모르니 맘대로 부과
에어컨 있는 주인집 요금 나눠 내
“비싸다” 항의하면 “싫으면 방 빼”
요금 눈치 보여 에어컨도 못 달아
지난 1일 서울의 한 쪽방촌 일대에서 주민들이 그늘을 찾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역 인근 동자동 쪽방촌에 살고 있는 김모(76)씨는 며칠 전 집주인이 문 앞에 붙여 놓고 간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5월 전기요금 3만원’. 전월엔 1만2000원이었는데, 한 달 만에 150%가 오른 셈이다.

 

집주인에게 갑자기 전기요금이 대폭 오른 이유를 묻자 “(한국전력공사가) 전기요금을 올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한전은 이달 1일부터 전기요금을 1킬로와트시(㎾h)당 5원 인상한다고 발표해 8월에 나올 고지서부터 반영돼야 하는데, 집주인이 미리 올린 것이다. 항의도 해 봤지만 “싫으면 나가라”는 집주인의 강경한 반응에 맥없이 돌아서야 했다. 김씨는 “여기서 나가면 노숙 생활을 해야 한다”며 “누울 자리는 있어야 하니 (전기요금을)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며 한숨지었다.

 

에어컨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쐤다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일찍 찾아온 폭염 속에 김씨가 의지할 것은 벽에 설치된 선풍기 하나뿐이다. 한 평 남짓한 그의 쪽방은 폭우 땐 물이 새고, 밤에는 쥐까지 나온다. 그의 월 수입은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인연금을 합쳐 총 83만원이다. 이 중 30%에 해당하는 25만원을 쪽방 월세로 내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전기요금마저 크게 올라 김씨는 남은 돈으로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틸지 막막할 뿐이다.

 

폭염과 장마 속에 집주인의 ‘전기료 갑질’까지 더해 쪽방촌 주민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6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전기료 갑질이 가능한 이유는 집주인의 고지서 독점 때문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전용 계량기가 없어서 한전으로부터 전기요금 고지서를 따로 받을 수 없다. 쪽방촌처럼 여러 가구가 하나의 계량기를 공유하는 경우 집주인이 고지서를 받아 정산한 후 다른 입주민들에게 전기료를 통지하는 방식으로 전기요금 징수가 이뤄진다.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 사는 서 모(56) 씨의 방문에 집주인이 붙여 놓은 전기료 ‘쪽지 고지서’. 서 씨 제공

집주인들은 전기료를 월세에 반영하거나 ‘쪽지 고지서’로 세입자들에게 통지한다. 쪽지 고지서는 집주인이 전기요금·도시가스비·수도세를 메모지에 손으로 적어서 문 앞에 붙여 두는 식인데, 김씨가 받은 것처럼 금액만 달랑 적혀 있을 뿐이다. 두 방식 모두 전기 사용량 등 금액 산출 근거는 설명도, 전달도 안 된다.

 

입주민들은 집주인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 조모(66)씨는 “5명이 사는 쪽방에 전기요금이 10만원 나오면 2만원씩 받아야 하는데, 집주인은 3만원씩 내라고 하는 것 같다. 올려 받는 걸 다 아는데, 어쩔 수 없으니 내는 것”이라면서 “어떤 집은 지난해 겨울 집주인이 갑자기 10만원을 내라고 해서 항의했더니 ‘대신 다음 달에 깎아 줄게’라고 했다더라. 자기들 마음대로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요금 체계에 대한 불만도 크다. 쪽방뿐 아니라 다세대주택 등 여러 가구가 하나의 계량기를 공유하는 경우 한전은 총 금액을 계량기를 공유하고 있다고 신고된 가구 수로 나눠서 고지한다. 5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에 5만원이 나오면 가구별로 1만원씩 책정하는 식이다.

 

문제는 가구별 전기 사용량이 다르다는 점이다. 서모(56)씨는 “같은 층에 집주인과 다른 쪽방 주민 3가구, 총 5가구가 계량기를 공유하는데, 집주인 방은 세입자들 방보다 더 큰 데다 에어컨도 있다”면서 “집주인과 입주민이 같은 요금을 지불하는 건 억울하다”고 말했다.

폭염으로 온열질환자가 속출한 지난 3일 서울의 한 쪽방촌 주민이 선풍기를 켜고 방에 누워 있다. 뉴스1

주먹구구식 전기요금 정산과 징수 체계는 정부의 지원도 무력하게 만든다. 서울시는 올해 쪽방촌에 에어컨 설치를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입주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에어컨을 설치하면 집주인에게 전기요금을 2만∼3만원 더 내야 하는 쪽방촌의 ‘불문율’ 때문이다. 지원을 받고 싶어도 다른 쪽방 주민들의 요금도 같이 오른다는 점 때문에 집주인뿐 아니라 쪽방촌 입주민들끼리도 서로 눈치를 봐야 한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몇 년 전에 에너지 재단에서도 에어컨을 지원해 줬는데, 전기요금 문제와 건물 안전 문제로 집주인이 반대해 설치하지 못했다. 이번에 서울시에서 에어컨 150대를 설치한다고 하는데, 쪽방 건물주를 설득해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것은 단기 대책이고, 장기 청사진도 필요하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이 정말 약자와의 동행을 한다면 이런 주거환경을 어떻게 개선할지, 공공주택 사업은 어떻게 진행할지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연 기자 ch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