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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 유럽에 옛 소련 둘러싼 ‘역사전쟁’ 촉발하나

북유럽·동유럽 5국 "소련 흑역사, 제대로 가르쳐야"
2차대전 초반 북유럽·동유럽에서 침략 일삼은 소련
나치 침공으로 극적 반전… ‘침략자→전승국’ 둔갑

‘나치는 패전과 전범재판을 통해 처단됐고 독일은 지난 과오를 반성했다. 그런데 소비에트의 범죄는 왜 응징도, 제대로 된 평가도 이뤄지지 않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유럽에 옛 소련을 둘러싼 ‘역사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다. 소련의 후예를 자처하는 러시아는 과거 공산주의 소련이 저지른 잘못을 사과한 적이 없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되레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공공연히 외친다. 1917년 소련 출현 후 그로 인해 크나큰 피해를 본 북유럽 및 동유럽 국가들이 뭉쳐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소련이 인류사에 끼친 해악을 정확히 기술하고 이를 자라나는 세대에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목된다.

 

지난 6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리투아니아 방문을 계기로 한 자리에 모인 발트3국 정상들. 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러시아가 발트3국 안보를 위협하는 경우 독일이 앞장서 방어하기로 합의했다. 왼쪽부터 잉그리다 시모니테 리투아니아 총리,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 숄츠 총리,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 크리스야니스 카린스 라트비아 총리. 칼라스 총리 SNS 캡처

◆북유럽·동유럽 5국 "소련 흑역사, 제대로 가르쳐야"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 크리스야니스 카린스 라트비아 총리,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 클라우스 요하니스 루마니아 대통령 5인은 22일(현지시간) EU 회원국 정상들 앞으로 ‘유럽의 기억(European memory)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공동 서한을 보냈다. 북유럽 발트3국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그리고 동유럽의 폴란드·루마니아는 모두 EU 회원국인 동시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다.

 

그간 대(對)러시아 제재 및 우크라이나 지원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내 온 이 5개국 정상들은 서한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이는 잔혹한 침략전쟁은 국제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권위주의의 발흥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며 “이는 20세기 유럽에서 잔인한 전체주의 정권인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새삼 일깨운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2차대전 후 나치와 소련 공산당이 받은 처우를 비교했다. 나치 독일은 전쟁에 졌고 그 결과 지도부는 전범재판에 넘겨져 처벌을 받았다. 독일은 사과와 배상을 했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모든 국가는 학교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등 나치의 ‘흑역사’를 가르친다. 그럼 공산주의 소련은 어떤가.

 

5개국 정상들은 “소련의 범죄에 대한 기억과 지식은 유럽인들의 의식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소련의 잘못을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것 또한 모든 EU 회원국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개국이 주도해 EU 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할 뜻을 분명히 했다.

 

1939년 8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이 체결되는 장면. 앉아서 서명하는 이는 소련 외교장관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서 있는 이는 독일 외교장관 리벤트로프다. 스탈린(오른쪽 두 번째)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차대전 초반 북유럽·동유럽에서 침략 일삼은 소련

 

공동 서한에 참여한 5개국은 저마다 과거 소련한테 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3국은 1939년 2차대전 발발 직후 소련 스탈린 정권으로부터 “주권을 내놓지 않으면 군대를 진주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이는 그해 8월 체결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에 따라 독일이 발트3국을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한 데 따른 것이다. 발트3국은 소련의 무력 앞에 굴복했고 이듬해인 1940년부터 소련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세 나라는 1991년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비로소 독립을 되찾았다.

 

2차대전은 1939년 9월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며 시작된 것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폴란드군이 서쪽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그해 9월17일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전격 침공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또한 독·소 불가침조약에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절반씩 나눠 갖는다’는 내용의 비밀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폴란드는 나라가 두 동강이 나 서부는 나치 독일, 동부는 공산주의 소련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1990년 여름 에스토니아 시민들이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3국은 2차대전 도중인 1940년 소련에 의해 불법으로 점령당했으며 1991년 소련 해체를 계기로 독립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독·소 불가침조약은 폴란드, 체코 등을 제외한 동유럽은 소련 영향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 2차대전 도중인 1940년 6월 소련은 루마니아에 “북부 영토를 할양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소련군이 진입하자 루마니아는 저항을 포기하고 북부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땅을 소련에 넘겼다. 이는 그대로 소련 영토로 남게 된다.

 

◆나치 침공으로 극적 반전… ‘침략자→전승국’ 둔갑

 

이렇게 보면 소련은 사실상 독일과 동맹을 맺고 2차대전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이번 5개국 공동 서한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핀란드 또한 같은 시기 소련에 호되게 당했다. 1939년 11월 소련은 핀란드에 주권 양도를 요구했고 거절당하자 침공을 단행했다. 이른바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핀란드군은 끈질기게 잘 싸우며 소련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으나 총체적인 국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인 1940년 3월 핀란드가 소련에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이 마무리됐다. 핀란드는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대가로 영토의 10%가량을 소련에 빼앗겼다.

 

1939년 8월 체결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풍자한 신문 만평. 히틀러(왼쪽)와 스탈린이 악수하며 나란히 발로 폴란드를 짓밟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차대전 초반 소련의 이런 행태는 국제사회의 공분을 자아냈다. 국제연맹(유엔의 전신)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략한 직후 사실상 전범국으로 지목해 소련의 회원국 지위를 박탈하고 연맹에서 제명했다. 하지만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하면서 극적인 반전이 이뤄진다. 히틀러 처치가 급했던 미국·영국은 과거사에 눈을 질끈 감고 소련과 손잡았다. 소련은 군인과 민간인을 더해 무려 270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극 속에서도 가까스로 살아남아 1945년 마침내 나치 독일을 제압하고 미국·영국과 더불어 3대 전승국 반열에 오른다.

 

에스토니아, 폴란드 등은 2차대전 초반 소련이 나치 독일과 다름없는 ‘침략자’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소련이 전승국이 되면서 의도적으로 은폐된 이 시기 역사를 되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러시아는 2차대전에서 제일 많은 희생을 치른 것도, 나치 독일 타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도 소련이라며 “소련이 위대한 전승국이란 역사는 결코 부정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박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