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생애 가장 절망적이던 순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제주였죠.”
지난달 15일 제주도 서귀포시 ‘3대 맛집’으로 꼽히는 ‘낭쿰낭쿰’ 식당주 방경숙(55)씨는 잠시 말문을 멈췄다.
방씨가 홀로 제주도에 내려온 것은 2014년 겨울이었다. 빈털터리 사정 탓에 자녀는 데려올 수 없었다.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별다른 전문기술도 없던 방씨가 택한 것은 식당이었다. 방씨는 이듬해 작은 백반집을 열었다. 백반정식뿐 아니라 닭볶음탕, 김치전골, 낙지볶음까지 각종 메뉴를 늘려 봤지만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하루 매출은 10만원을 넘기지 못했다. 방씨는 작은 식당 안에 딸린 더 작은 단칸방 속에서 하루하루 생활고에 지쳐 갔다.
◆줄 서서 먹는 맛집 된 13호점, 분점에 밀키트 출시까지
“‘맛있는 제주 만들기’ 식당 13호점으로 선정되셨습니다.”
방씨 인생의 전환점은 2016년 걸려 온 이 한 통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처음엔 누가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어요. 저는 신청한 적도 없었거든요. 며칠 뒤 저희 가게에 찾아온 박영준 셰프님을 보고서야 ‘이게 진짜구나’ 실감을 했어요.” 알고 보니 방씨의 힘든 사정을 안 인근 동사무소 직원이 방씨 몰래 ‘맛있는 제주 만들기’ 프로그램을 신청했던 것.
‘맛있는 제주 만들기’(맛제주) 프로젝트는 호텔신라가 2014년부터 제주도청, 지역방송사와 함께 펼치고 있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요리, 시설, 서비스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호텔신라 태스크포스(TF)팀이 음식 조리법, 서비스 교육과 더불어 주방 설비를 비롯한 식당 시설과 내부 인테리어 등을 개선해 영세식당의 자립을 돕고 있다.
맛제주 실무를 맡고 있는 호텔신라 조리기획 책임 주방장 박영준(43) 셰프는 먼저 식당 근처 상권 조사와 함께 인근 주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소비층 분석에 나섰다. 박 셰프는 조사 결과, 돼지고기를 기반으로 한 신메뉴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메뉴 개발 작업에 들어갔고, 호텔신라 총주방장과 식당주 품평회를 거쳐 최종 메뉴가 확정됐다. 그렇게 개발한 메뉴가 바로 낭쿰낭쿰의 대표메뉴 ‘흑돼지갈비전골’이다. 방씨는 호텔신라 연회장 조리실에서 한 달간 돼지고기에 칼집을 내는 것부터, 편차 없는 정확한 계량을 통한 양념 만들기 등 박 셰프의 집중 교육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식당은 리뉴얼 작업에 들어갔다. 호텔신라는 주방 공간 확대와 노후화한 시설물 전면 교체 등 식당 환경도 대폭 개선했다. 식당 가오픈 기간인 두 달여 동안 박 셰프는 식당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했다.
6년이 지난 현재, 방씨의 낭쿰낭쿰은 어느새 ‘줄 서서 먹는 서귀포 3대 맛집’이 됐다. 포털사이트에는 낭쿰낭쿰을 찾았던 ‘방문객 리뷰’가 1500여개 올라와 있다. 박 셰프는 “얼마 전 낭쿰낭쿰에 왔다가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며 자신이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보여 줬다. 대표메뉴였던 기존의 갈비전골은 낙지와 전복을 추가한 ‘흑돼지해물갈비전골’로 한차례 리뉴얼했다. “이젠 저 혼자 1시간에 고기 15㎏도 거뜬하게 (칼집을) 떠요.” 방씨의 활짝 웃는 얼굴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방씨의 든든한 아들은 이제 요리 공부를 하며 주방일을 돕고 있다.
방씨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방씨는 지난달 서귀포 대정읍에 낭쿰낭쿰 분점을 열었다. 신발공장을 하다가 폐업해 생계가 막막해진 동생 부부가 제주도로 내려와 운영 중이다. 밀키트 출시도 준비 중이다. 방씨는 “나처럼 빈털터리로 힘들었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선한 재능기부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두 평 남짓한 방씨의 식당 한쪽 벽면엔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과 단둘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살포시 미소 짓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에 절로 눈길이 갔다. 방씨는 “실은 저 사진에는 사연이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호텔신라는 2018년 맛제주 5주년을 맞아 식당주들을 1박2일로 제주 호텔에 초청했다. 이날 모임에서 여성 식당주들과 이 사장은 각자 애창곡도 한 곡씩 부르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호텔신라는 식당주들에게 이 사장과 단둘이 찍은 사진도 기념으로 선물했다. 방씨는 “전날 찍은 제 사진이 마음에 안 들게 나와서 혼자 좀 속상해하고 있었거든요(웃음). 근데 이부진 사장님께서 그 얘길 전해 들으시고 다음 날 저에게 오시더니 ‘다시 한 장 같이 찍으시자’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그렇게 나온 사진이에요.”
식당주들과 이 사장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이 사장의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작고했을 때에도 식당주들은 각자 한 자 한 자 손편지를 써서 이 사장을 위로했다. 이 사장도 식당주들에게 어려움이 생겼을 때 손편지를 써서 보내곤 한다.
◆서로 돕고 도움 받으며 함께 나아가는 ‘동행’… 내년 10주년
“어머니, 저 왔어요” “응. 아들 왔어?”
서귀포시 중정로에 위치한 ‘메로식당’. 건강음료 한 상자를 손에 든 박 셰프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당주 남신자(70)씨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박 셰프가 가게에 자주 오나 보다’라는 기자의 말에 남씨는 “이제는 사부님이자 아들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남씨의 메로식당은 8년 전인 2014년 맛제주 3호점으로 선정됐다.
남씨는 2005년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딸을 홀로 돌보며 손녀를 키워 오고 있다. 남씨는 “당시 초등학생이던 손녀딸이 대학 졸업하는 날까지는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식당을 계속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왔다”면서 “그 손녀딸이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한동안 관광객과 손님이 줄면서 남씨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래도 호텔신라와 인연이 잘 맺어진 덕에 이렇게 웃으며 살 수 있다”고 남씨는 말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마음을 나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될 때가 있거든요.”
호텔신라의 맛제주는 ‘동행’이다. 식당주들과 박 셰프 등 호텔신라 관계자들은 ‘좋은 인연’이란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노인회에 음식을 대접하는 지역사회 환원활동도 함께 해 오고 있다.
호텔신라 하주호 부사장은 “해를 거듭하면서 우리 직원들이나 식당주들이 이제는 서로 가족 같은 관계가 됐다”면서 “코로나19 여파 때는 식당주들이 제게 전화를 해서 ‘호텔이랑 면세점이 코로나19로 어렵다는데 이렇게 우릴 도와주실 여력이 있느냐’며 걱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맛제주는 이제 내년이면 시행 10주년을 맞는다. 신라호텔 관계자는 “프로그램 9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초창기에 선정된 식당들 중 노후화한 곳들도 있다”면서 “1호점부터 하나씩 식당 리뉴얼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맛제주’ 핵심 가치는 사람… 서로의 아픔에 공감이 시작”
“‘맛있는 제주만들기’의 핵심가치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영업주분들에게 도움을 드린다는 생각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반자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호텔신라의 ‘맛있는 제주 만들기’(맛제주) 실무자인 박영준(43·사진) 조리기획책임주방장(셰프)은 지난달 15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셰프로서 신메뉴와 조리기술만 잘 전달하면 된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영업주들과 오랜 기간 희로애락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는 한 가족, 한 팀이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셰프는 “2016년 맛제주 3주년을 맞아 식당주들을 서울 호텔로 초청했는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울음바다가 됐다”며 “그날이 내게 터닝포인트가 됐다”고 말했다.
박 셰프는 맛제주 식당 재개장에 소요되는 평균 3개월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식당주들과 함께한다. “도내 맛있는 음식점에 가서 함께 맛을 보고, ‘잘되는 가게’에 가서 서비스 등을 눈으로 보여드려요. 도매시장에서 가서 식자재 선별법 등을 알려드리기도 하고요”. 재개장 이후에도 수시로 맛제주 식당들을 방문해 근황이나 고객 반응, 식재료 보관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제주도에 태풍이나 폭설이 내리면 혹여나 식당들에 피해가 없는지 ‘순찰’을 나간다. 박 셰프는 ‘보람을 느끼는 순간’으로 “맛제주 신메뉴 개발이 잘 됐을 때”를 꼽았다. 최근 SNS와 방송 등에서 인기를 끌며 소위 ‘대박’을 친 ‘제주 토마토 짬뽕’도 박 셰프가 맛제주 9호점을 위해 개발한 메뉴다. 그는 “9호점이 위치한 애월 해안도로가 너무 예뻐서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메뉴를 개발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나와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삶의 굴곡과 고단함으로 어둡던 식당주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큰 보람이다. 박 셰프는 “영업주분들이 ‘그동안 기댈 곳이 없었는데 이제는 든든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며 “한분 한분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