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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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쑹 남매의 미국에서의 구국활동

중국 가문 중 쑹(宋)씨 집안만큼 미국의 추앙을 받은 가문도 없었다. 쑹씨 일가는 상하이의 대표적 자본가 집안이다. 이 집안을 일군 이는 쑹자수(찰리 쑹)였다. 본래 하이난다오의 한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입양을 통해 쑹씨가 된다. 17세 때 가족들과 미국에 이민 간 후 기독교로 개종했고, 듀크대과 밴더빌트대에서 공부했다. 25세에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1년만 종사한 후 출판업을 시작했다. 쑨원을 만나면서 그는 신해혁명(1911)에 동참하고 정치에 입문한다.

 

그의 슬하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장남 쑹쯔원은 하버드와 컬럼비아대를 졸업했다. 귀국 후 중국 중앙은행장, 재무장관, 외교장관과 총리까지 역임했다. 3명의 여동생은 혁명 전에 미국에 유학 갔다. 첫째 쑹칭링은 중국의 국부인 쑨원과 결혼했다. 둘째 쑹아이링은 미국 오벌린대와 예일대를 졸업한 중국의 대표적 금융가이자 산업부 장관을 지낸 쿵샹시와 결혼했다. 막내 쑹메이링은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와 결혼했다.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쑹메이링. 출처:타임

쑹씨 집안의 대표 인물들은 미국 대학 졸업자이자 개신교 신도였기에 미 정계와 재계를 총망라한 인맥을 자랑했다. 이들은 미 대통령과 독대할 정도의 친분을 가졌다. 이들이 미국을 방문하면 미 대통령들도 이들에게 백악관 별채 또는 자신의 별장을 숙소로 내어줬다. 이들은 중국의 발전과 ‘민주화’를 명목으로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개진했다. 이런 활동은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한 1927년부터 미 정부에 대한 로비로 전환됐다.

 

중·일전쟁으로 이들의 미 정부에 대한 지원 요청은 날로 커졌다. 가령, 1940년에 이들은 2500만∼1억달러를 요청했다. 여의치 않자 1억4000만달러를 세 차례로 분할해줄 것을 요구했다. 5000만달러만 가능해지자 이들은 하이난다오와 타이완을 미국에 99년간 조차하는 안까지 제시했다. 만약 미국이 이를 수용했다면 오늘날 대만의 운명은 달랐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1941년까지 9400만달러의 차관을 확보했다. 이들의 성공에는 헨리 모건소 미 재무장관 등과 같은 친중파 인사들의 적극적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