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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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의료계 민낯 드러낸 아산병원 사태

뇌출혈 간호사 수술 의사 없어 사망
전국에 뇌수술 가능 의사 146명뿐
필수의료 인력 부족 구조적 문제
의료수가 정비, 건보 누수 막아야

요즘 의료계가 무척 시끄럽다. 서울아산병원 30대 간호사가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수술을 집도할 당직 의사가 없어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숨져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 빅5, 세계 50위권 안에 드는 굴지의 종합병원에 뇌출혈 응급수술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병원에 머리를 여는 개두(開頭)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2명밖에 없는데, 해외연수·휴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생명을 다투는 응급의료시스템이 이토록 허술하게 운영되는 현실이 놀랍다.

의료 현장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대한뇌졸중학회에 따르면 전국 163개 응급의료센터 중 30% 이상은 24시간 뇌졸중 진료가 가능하지 않다. 뇌경색 환자의 15∼40%는 첫 방문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이송된다고 한다. 일류 병원 간호사가 직장에서 쓰러져도 제때 수술을 못 하는데, 일반인이 더구나 지방에서 쓰러지면 수술대에 오를 수 있을까. 뇌질환 환자와 그 가족들은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뇌혈관질환은 암·심장질환·폐렴에 이어 국내 사망원인 4위다. 지난 5월 뇌출혈로 갑자기 숨진 영화배우 강수연씨 사례처럼 뇌혈관 수술 수요는 급증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2017년 9469명에서 지난해 1만3769명으로 4년 동안 45%나 증가했다. 고령인구 급증으로 뇌질환 개두수술 환자는 늘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삼성서울·세브란스·서울대병원 등 빅5에 뇌출혈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2∼4명에 불과하다. 정부 지원을 받는 권역별 심뇌혈관질환센터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전국 뇌혈관 외과의는 146명에 불과해 지방 대학병원의 경우 아예 없는 곳도 많다.

이번 사태의 근저에는 필수의료 분야 인력 부족, 3D 진료과 기피, 중증도에 비해 낮은 의료수가 등 문제가 얽혀 있다. 간호사협회와 보건의료노조는 “의사 부족 탓”이라며 “정부가 병원에 필수의료 인력 고용을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 등 보상체계가 원인”이라고 한다. 머리를 여는 어렵고 위험한 수술을 해도 의료수가가 400만원이 안 된다. 성형미용 수술 비용보다 못하다는 푸념이 나온다. 병원은 수지가 안 맞아 의사 채용을 꺼리고, 지원자도 급감해 젊은 뇌질환 외과의가 멸종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방재승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교수 2명이 1년 내내 퐁당퐁당 당직을 선다”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이 같은 비정상이 뇌질환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아과 응급시스템도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일산백병원 응급실에는 전공의가 없어 소아환자를 아예 받지 못한다. 전국의 소아외과 의사가 40여 명밖에 안 되는 탓이다. 다른 외과로 이런 현상이 번지고 있다니 우려스럽다.

의료시장을 정상화하려면 건강보험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선 표를 얻기 위해 건보 보장 확대를 남발하는 정치인부터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문재인정부는 ‘문케어’를 내세워 가벼운 두통을 앓아도 값비싼 MRI 촬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탈모약 건보 적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런 선심성 공약 탓에 정작 생사를 다투는 분야로 돈이 흘러가지 않아 사각지대가 커지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지 않은 쪽의 지출을 줄이고 필수의료 분야 지원을 늘리는 데 건보 재정이 쓰여야 한다. 왜곡된 의료수가 체계를 재정비해 선진국처럼 뇌질환, 심장 등 3D 분야 의사들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야 젊은 의사들이 힘든 분야를 지망할 테고, 국민들은 생명과 직결된 의료를 늦지 않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진상조사 후 대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급한 불만 끄고 보자’는 미봉책에 그쳐선 안 된다. 필수의료 인력 확충과 응급의료 개선 등 포괄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 국회도 사안의 중대성을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