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 윤석열 대통령의 만남을 둘러싼 혼선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미묘한 처지를 새삼 절감케 했다. 대통령실은 두 사람의 회동 불발에 대해 윤 대통령의 휴가 때문이라고 했다가 ‘중국 눈치 보기’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전화 통화 일정을 공개했다. 미·중이 대만 문제로 서로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휴가 중이던 윤 대통령으로선 동맹국 의전 서열 3위인 펠로시 의장을 모른 체하기도, 일부러 나와서 만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전화 통화로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의 결정이 적절했는지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이처럼 곤혹스러운 상황에 내몰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데 문제가 있다. 미·중 갈등이 대만해협, 미국 주도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3불(不)’ 등을 둘러싸고 전방위로 확산하고 있어서다. 한국이 미·중이라는 두 거인 사이에서 눈치를 보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는 양국의 전략 경쟁이 몰고 올 높은 파고를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펠로시 대만행으로 양안 긴장 최고조
지난 주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미·중의 패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양국의 첨예한 갈등이 무역과 첨단기술을 넘어 무력 충돌 위기로 치달을 수 있음이 드러났다.
중국이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에 거세게 반발하는 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침해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중국이 대규모 무력시위를 통해 대만해협을 위기로 몰아간 것도 이 때문이다. 대만을 봉쇄할 군사적 능력이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사흘 동안 실시된 중국의 군사훈련은 대만을 빙 둘러싼 형태로 진행됐다. 탄도미사일과 군용기 100여대, 군함 10여척이 동원됐다. 중국군은 대만 동서남북 사방에 장거리포와 미사일을 쏟아부었다. 대만해협을 통과한 둥펑 미사일 여러 발이 일본이 정한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떨어져 일본 당국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중국 해사국은 오는 15일까지 서해 남부 일부 수역에서 실탄사격 훈련을 하고, 보하이(발해)만 지역 다롄항 인근 바다에서도 1개월 동안 실사격 훈련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양국의 힘과 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이 일상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중 모두 중요한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양국 간 긴장 수위는 낮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선 11월 중간선거가 치러지고, 중국에선 올가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을 확정하는 제20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린다.
대만해협의 파고가 높아지면 한반도 안보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 당장 북핵 해결은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대중 견제에 참여하라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요구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중 관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중심의 기술패권 경쟁도 가열
미·중 대결의 또 다른 전선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 패권 경쟁이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서두르면서 한국에도 동참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해 연일 견제구를 날린다. 중간에 놓인 한국은 난처한 입장이다.
미국 의회는 지난달 말 총 2800억달러(약 365조원) 규모의 ‘반도체산업 및 첨단기술 육성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에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처럼 미국에 비우호적인 국가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의 경쟁 위협에 대항해 미국의 기술 우위를 강화하기 위해 미 의회가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공급망이 더 확실한 탄력성을 갖게 됐다”고 환영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주도로 한국·일본·대만을 묶는 반도체 공급망 네트워크인 ‘칩4(Chip4)’도 추진 중이다. 한국에도 이미 참여를 제안한 상태다. 미국의 반도체 원천기술과 일본의 소재·장비, 한국·대만의 제조 능력을 결합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맞서겠다는 구상이다. 칩4 동맹이 성사되면 미국으로선 중요한 대중 견제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중국 정부는 대놓고 한국의 칩4 불참을 종용한다.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칩4를 통해) 인위적으로 국제무역 규칙을 파괴하며 전 세계 시장을 갈라놓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도 한국의 칩4 불참을 압박하는 행보를 이어간다.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수출 가운데 중국·홍콩이 차지하는 비중이 60%”라면서 “이렇게 큰 시장과 단절하는 건 상업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중국이 한국 반도체 수입을 제한하면 한국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점을 거론한 것이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우리 정부의 고심이 깊다.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미국 정부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난감한 처지여서다. 일본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상황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미·일은 지난달 말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AI)에 쓰이는 차세대 첨단 반도체 개발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냥 머뭇거리면 우리 입지는 극도로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이 칩4 예비회의에 참여하기로 한 것에서도 이런 고민이 읽힌다. 미국의 칩4 가입 요구에 화답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중국 반발을 감안해 특정 국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협력을 추진하자는 입장을 정했다고 한다.
◆사드 3불도 미·중 대결구도와 연관
자오 대변인은 지난달 27일 문재인정부 때 밝힌 ‘사드 추가 배치 불검토,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불참, 한·미·일 3각 군사 동맹 불가’를 사드 3불로 규정하고 “대외 정책의 기본적 연속성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3불은 한·중 간 약속이나 합의가 아니라고 한 데 대한 반박이다. 이에 미 국방부 대변인은 “사드 배치에 관한 어떤 결정도 한·미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논평을 냈다. 중국이 윤석열정부에 사드 3불을 계속 이행할 것을 요구하자, 미국이 대신 반박한 셈이다. 사드 3불이 한·중 사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중 갈등과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문재인정부에서 중국과 3불 협의를 주도한 남관표 전 국가안보실 차장과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모두 “정부의 입장 표명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중국이 “한국은 2017년 사드 문제에 대해 엄중한 입장을 밝혔고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억지를 부리는 건 우리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사드와 관련해 윤석열정부 운신의 폭을 좁히는 한편 한국이 미국의 대중 견제에 동원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익 관점 대응 원칙 세우고 실천해야
우리는 상당 기간 미·중이 세계 패권을 다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길게는 100년가량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한국은 양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좌고우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익의 관점에서 원칙과 방향을 세운 뒤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미동맹의 큰 틀 속에서 중국을 고려하면서 사안별로 실리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