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예보를 봤지만 자차로 출근했다. 저녁 약속 후 조금이라도 일찍 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서울 용산 회사에서 지하철역이 없는 경기도 성남시 자택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30분가량. 운전을 하면 아무리 차가 막혀도 1시간 안엔 간다. ‘빗속 운전을 안해본 것도 아니고 천천히 달리면 괜찮겠지.’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날이 2022년 8월 8일, 서울에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린 날로 기록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용산 서빙고로에 위치한 세계일보에서 오후 8시55분 주차장을 나섰다. 굵어진 빗방울이 차를 무섭게 때렸다. 전조등을 켜고 와이퍼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 비 때문에 차선을 보기 어려웠다. 앞 차의 후면 라이트와 신호등을 보며 천천히 따라갔다.
반포대교로 향하기 위해 삼각지역에서 우회전을 했다. 비가 더 거세졌다. 앞차가 비상등을 켜길래 따라 켰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한강을 건넜다. 이 때까지만해도 ‘그래, 이렇게 가면 되지. 잘 하고 있어’라며 스스로 다독여 침착함을 유지했다.
평소와 같이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강남성모병원 앞에서 좌회전했다. 이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조금 전진하니 반대편 도로가 이미 강이 되어 출렁이고 있었다. 용감한 차량 몇 대가 바퀴가 3분의 2쯤 잠기는 그곳을 지나고 있었고 한 차량은 시동이 꺼져 차 주인이 우산을 쓰고 밖에 나와 있었다. 뉴스로만 보던 차량 침수 상황을 코 앞에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 앞에도 커다란 연못이 생겨 있었다. 이미 많은 차들이 뒤엉켜 우회할 수는 없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침을 크게 삼키고 물을 건넜다. ‘휴, 살았다’라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두 시간을 더 운전하게 될 거란 걸 이 때도 몰랐다.
삼호가든 사거리 쪽으로 다가가니 길 건너 차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진입로까지 꽉 막힌 것 같았다. 우회하는 게 낫겠다 싶어 교대역 방향으로 우회전 했다. 법원쪽은 오르막이니 침수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웬걸. 신호는 초록색인데 차들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비 때문에 앞 상황을 알 수도 없었다. 거북이 걸음으로 10여분 전진한 뒤에야 왜 차들이 우물쭈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유소 앞쪽에 바다가 생겼고 그 앞에서 차들이 유턴을 해야할지 건너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용기를 낸 몇몇 차들은 안타깝게도 물 속에 갇혀버렸다. 도저히 지나갈 수 없겠다는 판단에 차를 돌렸다. 늦더라도 아까 그 길로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00m만 더 가면 고속도로인데 차가 100m 전진 후 움직이지를 않았다. 20분을 그대로 서 있었다. 신호등도 계속 빨간불이었다. 이어 빗속에서 경찰이 왔다갔다 하더니 모든 차들이 유턴을 하기 시작했다. 도로가 침수돼 통제한 것이었다. 나도 따라 차를 돌렸지만 ‘멘붕’이 왔다.
삼호가든 사거리에서 내가 지나온 성모병원 앞 길, 교대로 향하는 우회전 길, 경부고속도로로 가는 직진길 세 개가 막혔다. 남은 길은 고속버스터미널역과 반포역 중간 도로 하나 뿐이다. 그런데 그쪽은 내리막이었다. 들어갔다가 차가 물에 떠내려갈 지 몰랐다. 일단 길가에 차를 대고 비상등을 켠 채 인터넷 검색을 했다. 강남·서초 일대가 물에 잠겼다는 속보가 뜨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정보는 찾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길을 가볼까 말까. 10분가량 고민하며 지켜보니 밀리던 차가 조금씩 빠지는 걸로 보였다. ‘가보자.’ 떨리는 마음으로 우회전을 했다. 계속 내리막이라 오히려 침수 구역이 없었다. 또 방금 어떤 상황이 정리된 듯 경찰차가 서 있었고 경찰 한명이 전진하라는 안내를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앞뒤로 흔들리던 붉은 신호봉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반포 자이 아파트를 빙 돌아 드디어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됐다, 됐어. 이제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물폭탄이 쉴 새없이 떨어졌다. 고속도로 곳곳에도 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삼면이 바다인 사거리에 갇혔던 아까와 비교하면 매우 양호한 수준이었다. 앞차와 안전거리를 넓게 유지하며 느릿느릿 운전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하늘 아래서 폭우가 쏟아지는 길을 헤쳐 나가자니 지옥으로 가는 길이 따로 없었다.
수백미터 줄에 갇힌 과천행 차량들을 지나 계속 가니 ‘경기도’ 표지판이 나왔다. 소리 내어 외쳤다. “와, 경기도다!” 곧 집에 도착이다. 그런데 다 왔다고 생각한 집 근처에서 이날 본 중 가장 큰 장애물을 만났다. 아파트 앞 도로가 계곡이 되어 세차게 흐르고 있었던 것. 우리 아파트는 동네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더 위쪽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깊다면 떠내려 갈 수 있을 정도의 유속이었다. 우회전 해 50m만 더 가면 주차장 입구인데 앞 차가 가지를 못했다. 나도 뒤에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차를 버려야 하나.
그 때 우회전을 기다리던 우리 두 차량 앞으로 직진차가 느릿느릿 전진하는 것이 보였다. 바퀴가 3분의 2는 잠긴 채였지만 밀리거나 시동이 꺼지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자 앞 차가 움직였다. 나도 엑셀을 밟았다. 갑자기 다시 멈춰버린 앞차 옆으로 크게 우회전해 쏟아 내려오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세상에서 가장 긴 50m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진입한 순간 사지에서 살아돌아온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시각이 밤 11시 35분. 2시간 40분 동안 극도의 긴장과 공포감 속에서 운전한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그제야 관련 소식이 쏟아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장면이 줄을 이었다. 내가 지나온 곳이 저랬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서울 남부에 있던 장마전선이 남하해 11시 이후부터는 우리 동네에 비를 퍼붓고 있었다. 집에서 아파트 입구를 내려다 보니 아까 그 50m에 차들이 엉켜 갇혀 있었다. 2시간40분 만에라도 집에온 건 천운이었다. 나는 간발의 차로 세이브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이건 재난이었다.
어제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을 독자들에게 안전한 운전방법을 알리고 싶었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에게 물었다. (관련기사 : ‘도로는 잠겼는데 집에는 가야겠고…침수지역 안전운전 요령’)
그가 소개한 폭우 시 침수구역을 지날 때 요령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침수구역은 웬만하면 우회한다
△우회가 불가능할 시 범퍼 높이 정도까지는 지날 수 있다
△지나가는 다른 차량을 보고 수심을 파악한다(다만 내 차 엔진 흡입구가 낮을 경우 다른 차보다 침수 피해를 입기 쉬우니 평소 자기 차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저속(기어 1∼2단)으로 쉬지 않고 한번에 지나간다
△침수구역을 지난 뒤 브레이크를 가볍게 여러번 밟아 물기를 털어내야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한다
△시동이 꺼지면 절대 다시 작동하지 않고 견인한다
아울러 이 수석연구원은 “많은 비가 예보된 날엔 운전을 하지 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당부했다. 비를 우습게 봤다가 호되게 당한 나는 앞으로 비오는 날엔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역사적 폭우가 쏟아진 그날 나와 함께 지옥길을 헤매던 차주들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