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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 없는 눈에 얼룩무늬 군복…그들은 한국군이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 법정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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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12일의 이른 아침. 베트남 꽝남성에 위치한 작은 마을 ‘퐁니’에 연이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8살의 어린 소녀 응우옌티탄은 가족들과 함께 집 안 방공호에 몸을 숨겼다. 덜덜 떨며 총소리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기도 잠시. 쌍꺼풀 없는 눈에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베트남어를 쓰지 않았다. 한 손에 수류탄을 든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해서 고함을 쳤다. 방공호에서 나오지 않으면 수류탄을 던질 기세였다.

 

겁에 질린 티탄의 가족들은 한명씩 밖으로 올라갔다. 처음으로 올라간 티탄의 오빠가 총도 가장 먼저 맞았다. 뒤이어 티탄의 왼쪽 옆구리에도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내렸다. 그들은 쓰러진 티탄 가족의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기를 품에 안은 티탄의 이모가 이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들은 말리는 이모까지 칼로 수차례 찔렀다.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퐁니·퐁넛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씨가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퐁니·퐁넛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62)의 법정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정황이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은 68년 2월12일 작전 중 퐁니 마을에 들어가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74명을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티탄씨는 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상대 손해배상 소송 변론기일에 출석, 그날의 기억을 생생히 증언했다. 

 

민간인 학살 관련 베트남인 피해자가 한국 법원에 출석해 증언한 것은 처음이다. 티탄씨는 학살 사건으로 가족 5명을 잃었다. 그는 2020년 4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3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당시 학살이 한국군의 소행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입장이다. 사건 이후 한국군도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한국 군복을 입은 ‘베트콩’이 벌인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티탄씨는 법정에서 “위장한 베트콩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국군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한국군은 쌍꺼풀 없는 얼굴 특징이 있다”며 “또 베트콩이라면 베트남어를 썼을 텐데,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9일 오후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퐁니·퐁넛 학살’ 사건 목격자 응우옌득쩌이. 뉴시스

이날 티탄씨의 삼촌 응우옌득쩌이(82)도 함께 법정 증언에 나섰다. 그 역시 학살 현장의 목격자다. 당시 남베트남 농촌개발단에서 일했던 쩌이씨는 사건 당일 무전 내용을 듣고 퐁니마을로 이동, 학살을 목격한 뒤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그는 “당시 미군들과 함께 마을 입구에서 퐁니마을을 망원경으로 지켜봤다”며 “한국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모았고, 마을 주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수류탄을 던졌다”고 증언했다. 

 

쩌이씨 역시 “그들은 한국군이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얼굴과 눈으로 구별했는데, 분명히 (베트남인과) 달랐다”며 “지금 여기(법정) 있는 사람들처럼 생겼었다”고 했다. 쩌이씨는 학살이 있기 전에도 베트남 길거리, 가게 등에서 한국 군인들을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생김새를 구별할 수 있었다는 취지다.

 

원고 측 대리인은 학살 직후 미군에 의해 촬영된 현장 사진도 제시했다. 왼쪽 가슴과 한쪽 팔이 잘린 여성의 사진을 보고 쩌이씨는 “저 여성을 직접 봤다”며 “아직 살아 있는 상태라 구조해 다낭으로 후송했으나 이후 사망했다”고 말했다.

 

쩌이씨는 “배상을 요구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이들은 입을 모아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이 진실을 인정하기만 바란다”고 했다. 티탄씨 또한 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베트남에서 이곳 한국까지 거짓을 말하러 오지 않았다”며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해달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 국민에게도 메시지를 남겼다. 

 

“한국 사람들, 저를 응원해 주세요. 이 재판에서 저를 도와주세요. 이 모든 것은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