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반지하엔 썩은 내, 대피소는 폐쇄” 갈 곳 잃고 떠도는 이재민들

폭우 피해로 대피소에서 지내는 동작·관악구 주민들
대피소 확진자 발생에 폐쇄…친척집·숙박업소 전전
“200만원 지원금으로 수리하라니”…세입자·주인 갈등도
서울 관악구 신사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지난 19일 만난 최지애씨가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최씨는 반지하 집이 침수돼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에서 2주 가까이 지내고 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아 2주가량 이곳 주민센터에서 지내고 있는데, 솔직히 많이 불편하죠.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지내야 하고 씻는 것도 불편하고… 그런데 돌아갈 곳이 없어요. 침수 탓에 하수구가 역류해서 반지하 집 전체에 곰팡이가 퍼지고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막막하네요. 뭐, 반지하 살고 싶어서 살았겠어요. 국가에서 말만 할 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사람들 하루빨리 지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수도권을 강타한 기록적인 폭우 이후 약 2주가 흘렀지만 침수 등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은 여전히 임시거주시설(대피소)과 숙박업소, 친척 집 등을 전전하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관악구 신사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만난 인근 주민들은 또다시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한숨부터 내쉬는 모습이었다. 딱딱한 바닥에 얇은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지낸다는 이들은 등이 배길 뿐 아니라 바닥의 찬 기 탓에 오래 눕지도 못한다고 전했다.

지난 8일 내린 폭우로 서울 관악구 신사동에 위치한 최지애씨의 집이 침수 피해를 입은 모습. 최씨 제공

 

지난 8일 밤 반지하 집이 침수돼 이곳에서 4인 가족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최지애(50)씨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쾅거린다”며 “침수 피해 이후 빗소리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털어놨다. 최씨는 “일단 집에서 가까운 주민센터에서 왔다갔다하며 집을 정리 중인데 치우고 치워도 끝이 없다”며 “천장 끝까지 물이 차올라 냉장고며 컴퓨터, 세탁기, 하다못해 이불까지 모두 쓸 수 없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대피소에서 만난 이재민들은 정부에서 지급하기로 한 긴급재난금 액수가 입은 피해에 비해 부족할뿐더러 세입자와 주인 간 싸움을 부추긴다고도 토로했다. 행정안전부가 이번 침수로 피해를 입은 가구에 20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는데, 원칙적으로는 실거주자가 지급 대상이지만 수리를 집주인이 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세입자가 합의한 경우 집주인과 반씩 나눠가지도록 하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집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어도 집주인과 합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곳저곳 떠돌고 있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신사동주민센터에서 만난 유순애(73)씨는 “근처 피해 주민들 다수가 집주인과 동주민센터에게 ‘긴급지원금 200만원을 반씩 나눠서 해결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갖다 버린 필수 가전만 해도 400만원이 넘는데, 집주인과 어디서부터 기준을 정해 부담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최씨는 “우리 집주인은 그 200만원을 핑계로 ‘100만원 안 받을 테니 지원금으로 도배, 장판, 보일러 등을 모두 알아서 복구하라’고 하더라”라며 “명확하지 않은 지원금 정책 탓에 오히려 더 피해를 보는 느낌”이라고 했다.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난 서울 동작구 사당동 극동아파트에서 지난 19일 중장비들이 무너진 옹벽 현장에 투입돼 작업을 하고 있다.

 

동작구 이재민들 역시 거처 마련을 하지 못해 불편한 대피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사당종합체육관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만난 극동아파트 주민 이모(68)씨는 “지난 8일 폭우로 산사태가 나 아파트 옹벽이 무너졌다”며 “비도 조금씩 계속 내리고 추가 붕괴 우려 때문에 최소 한 달 이상 대피명령이 내려져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전했다.

 

이날 찾은 동작구 극동아파트는 지난 8일 밤 폭우로 무너져내린 옹벽 인근에 방수포와 지지대를 설치하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등 공사가 한창인 모습이었다. 주민들은 산사태가 집을 덮친 당일 옷가지 몇 개만 챙겨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며 급박했던 당시 순간을 전했다. 옹벽 붕괴로 이날까지 500명 이상의 아파트 주민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산사태 당일은 시동생 집에, 다음날부터 이틀간은 동작중학교, 그 이후로 열흘 가량은 사당종합체육관에… 이렇게 전전하며 지내고 있다”며 “동작중에서 학생들 등교 문제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데 이곳에서도 언제 쫓겨날지 불안하다”고 했다. 이어 “기상이나 안전 점검 결과, 공사 상황 등에 따라 대피 기간이 두 달 이상으로 길어질 수도 있다는 구청 공지를 받았다”며 “구청에서는 가스레인지 딸랑 있고 어떤 가전제품도 없는 빈집에 임시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데 맨몸으로 나와서 어떻게 몇 달을 지내겠느냐”고 했다.

지난 19일 서울 동작구 사당종합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 빨래할 곳이 없어 손빨래를 해 텐트에 걸어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이야 애플리케이션으로 숙박업소도 곧잘 예약하고 그러는 모양인데 우리 같이 나이 들고 잘 모르면 국가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우려도 이어졌다. 사당종합체육관에서 주민 김모(62)씨는 “최근에 이곳에서도 확진자가 나왔고, 인근 주민센터에서도 나와 주민센터 대피소는 폐쇄됐다”며 “여럿이 한 군데에 모여있다 보니 코로나19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일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하는 등 더 조심하고 있는 분위기이긴 한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김씨는 “인근 모텔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받고, 지자체에서 지원해주는 2인 7만원의 숙박비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이재민을 위한 임대주택 등 지원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글·사진=김수연 기자 sooy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