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던 여행·관광 시장이 점차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되는 가운데 정작 업계에서는 외국인 여행객을 안내하고 인솔하는 관광가이드가 양산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의 목소리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최근 발의한 ‘관광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놓고 불거지고 있다. 관광 관련 종사원 인력양산을 골자로 한 이 개정안에 대해서 관광업계는 물론 지방자지단체에서도 비판하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탁상공론 형식의 개정안 발의라는 비판이다.
25일 국회 등에 따르면 최근 국민의힘 임병헌 의원(대구 중·남구) 등은 ‘관광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관광 소외지역에도 외국인 방문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각 지역 시·도지사가 이를 위한 지역문화관광 종사원을 양성할 수 있는 지원 근거를 마련하자는 게 핵심이다. 이번 개정안 발의를 통해 지역 문화와 관광자원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관광 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법안을 발의한 일부 의원실은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행·관광업계를 포함한 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러한 반응엔 사단법인 한국관광통역안내사협회(KOTGA)를 포함한 현역 관광통역안내사들이 적극 앞장서고 있다. 협회는 개정안 발의 사실이 알려진 뒤 수일 전 박인숙 협회장 명의로 성명을 내고 "현장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개정안"이라고 질타했다. 박 협회장은 “지역 특화 관광종사원의 양성과 활용은 현행법에서도 충분히 효과를 충족하고 있다”며 “5년간 100억원이라는 예산을 들여가며 유사인력을 추가로 양성할 필요성은 없다”고 지적했다. 예산 낭비라는 비판이다. 그의 지적대로 전국 각지엔 관광통역안내사를 비롯해 국내여행안내사, 문화관광해설사, 움직이는 관광안내소, 골목문화해설사, 청년해설사 등 각기 다른 이름의 특화된 수천명의 관광인력들이 양성돼 있는 상태다. 특히 외래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여행업자는 반드시 유자격 관광통역안내사를 종사하도록 한 관광진흥법 제38조 1항 등을 고려할 때, 개정안이 자칫 현행법 위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박 협회장의 지적이다.
관광통역안내사는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관광객에게 입국에서부터 출국까지 외국어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홍보대사나 마찬가지인 통역사다. 관광통역안내사는 그런 의미에서 민간 외교관으로도 불린다.
◆지역특화 관광종사원 부족?…전문 인력만 전국 3만5000명
‘외래관광객을 안내할 지역특화 관광종사원이 부족하다’는 법 개정 취지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올해 기준 관광통역안내사 취득현황을 보면 영어, 일어, 중국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어시아어, 태국어, 아랍어 등 관광통역이 가능한 인력만 전국 3만5426명으로 확인됐다.
이중 서울(1만6404명)과 경기(7097명), 인천(1515명) 등 수도권을 제외해도 1만410명의 전문 관광통역안내사가 전국에 배치돼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부산 3168명, 제주 2377명, 대구 845명, 경남 733명, 경북 610명, 대전 441명, 광주 342명, 충남 359명, 전북 334명, 강원 339명 등이다.
강원도의 경우 양양국제공항을 중심으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인 전용택시 도입과 관광통역안내사를 활용한 지역 관광지 홍보 등 맞춤형 정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강원도 여행·관광업 관계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지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를 지원할 관광통역 전문인력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특정 지역을 설명하는 전문가보다는 외국어와 우리 역사, 관광자원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전문 안내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관광업계는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에 전문 인력이 배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전문 자격증을 갖추지 못한 관광종사원을 무분별하게 배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협회장은 “이번 개정안을 통해 각 시·도지사가 지역특화 관광종사원 육성을 명분으로 관련 인력을 양산하게 된다면 사실상 ‘무자격 종사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며 “과거 2000년대 초반, 역사 왜곡을 일삼고 관광업계를 어지럽힌 무자격관광가이드와 관련한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앞서 수년 전에도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에 국사 과목이 배제될 것으로 알려져, 역사에 무지한 외국인 관광통역안내사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며 관광업계가 홍역을 앓기도 했다.
현재는 외래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역사왜곡, 전문지식 부족, 통역 미흡 등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은 국가자격증으로 관리되고 있다. 시험은 연 2회 시행되며 과목도 외국어 능력시험을 필수로 국사와 관광자원해설, 관광법규, 관광학개론 등 4개 교과로 구성됐다. 외국어, 관련 법규, 국사 등 전문성을 갖춘 인력인 만큼 지자체의 반응도 좋다. 실제 제주도와 울산광역시 등 일부 지자체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을 권장하는 등 보다 지역 관광지에 특화된 관광통역안내사 육성에 나서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관광통역안내사의 희망을 꺾는 일”
박 협회장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의원들의 개정안 발의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은 관광통역안내사들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코로나19로 국제관광이 중단, 관광업계가 너무 어렵다”며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일했던 관광통역안내사들은 3년째 실직상태로 근근히 버티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별다른 자격 없는 관광종사원 육성정책은 탁상행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박 협회장은 “현실을 도외시하며 무작정 유사인력을 양성하는 것보다 여행실무능력 등을 두루 갖춘 관광통역안내사들을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며 “전문인력 육성에 예산을 활용해야지 무자격 관광종사원을 양산하는 것은 예산낭비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60년간 한국관광 최일선에서 민간외교관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헌신해 온 관광통역안내사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달라”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힘이 되는 입법활동을 전개해 달라”고 촉구했다.
‘무자격 관광종사원 양산에 외국인 대상 관광사업 질 저하가 우려된다’는 본지의 기사가 포털 등에 게재된 이후 현역 관광통역안내사들은 현장의 실태와 애로사항을 살피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아니면 말고’ 방식의 입법활동을 질타하기도 했다. 관광통역안내사로 활동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한 협회 회원은 26일 “지금은 영어와 중국어 등을 구사하는 관광통역안내사들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니라, 기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소지자들에 대한 교육과 지원이 부실해서 오히려 더 문제”라며 “향후 추진되지도 못하고, 설사 추진되더라도 도태될 게 뻔한 무자격 안내사를 양산하려는 개정안의 취지를 이해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면서 “국회의원들이 개정안의 내용도 제대로 모를 수 있다”며 “보좌관들이라도 현장을 제대로 연구하고 조사해서 의원들이 입법활동을 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